시대별 한복

비빈예복, 妃嬪禮服, Queen & concubine’s formal robe

· 시대 :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 신분 : 왕실 / 여자

· 출처 : 순헌황귀비 외(1904~1907년 경)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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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분류 중분류 소분류 표제어 연관어
의례복 비빈예복 머리모양 어여머리 어염 족두리
장신구 접잠, 원잠
겉옷 원삼 황원삼, 홍원삼, 녹원삼
기타 흉배 용보, 봉흉배
대대 원삼대, 봉대
아래옷 스란치마 대란치마
아래옷 전행웃치마

비빈의 예복으로 원삼, 노의, 장삼 등이 있었으나 19세기 말 이후에는 원삼 한가지로 일원화되었다. 착용하는 의례에 따라서 동일한 인물이 원삼을 입는다고 해도 직금이나 부금으로 장식방법에 차이를 두고, 용봉문, 봉황문, 길상화문 등 문양의 종류도 달리했다. 순정효황후 황원삼, 영친왕비 홍원삼, 의화군부인 녹원삼 등이 남아있으며 의복발기에는 세자빈과 내명부 1품이 자적원삼을 입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신분별 색상의 차이를 분명하게 정의하기는 어렵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원유관복을 입을 때 왕비는 대수에 적의를 갖추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적의 대신 원삼을 입었으며, 전행웃치마를 입고 어여머리를 했다. 황제가 상복을 입을 때 황후는 전행웃치마를 갖추지 않고 쪽진머리에 화관을 썼다. 이러한 사례는 일제강점기에 의례가 간소화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동일한 원삼을 용도에 따라 차별화해서 착용했던 왕실 풍속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동일한 의례에서 동일한 예복을 입는다하더라도 신분에 따라 갖추는 의복에 차이가 있었다. 『상방정례』에는 적의를 예복으로 입을 때 왕비는 전행웃치마를 갖추지만 세자빈은 전행웃치마 대신 겹군을 입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대한제국기의 사진자료에도 황귀비는 전행웃치마를 입고, 나란히 서있는 의친왕비는 전행웃치마를 입지 않았다. 신분에 따라 갖추는 의복에 차이를 두는 예법이 지속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 이전에는 봉보[봉흉배견화] 또는 봉흉배를 썼으나 18세기 이후로 왕실의 적통을 잇는 여인은 용보[용흉배견화]를 달았다. 대한제국기에는 황후는 물론이고 황귀비도 용흉배견화를 달았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왕녀도 용흉배견화를 달았다. 종1품 귀인 양씨는 둥근 봉흉배견화를 단 원삼을 입은 사진을 남기고 있다. 군부인은 가슴과 등에 네모난 봉흉배를 달았으나 친왕비로 책봉되어 명복 원삼을 갖출 때는 둥근 용흉배견화를 달았다.
의례의 규모가 작은 명절이나 탄일[생신]에는 당의를 입었으며, 절기에 따라 소재와 색상을 달리하였다. 「졀복ᄉᆡᆨ장요람」에 따르면 설과 탄일에는 초록직금 당의, 스란치마, 스란웃치마를 입고 큰머리에 옥봉잠, 옥원잠, 니사연잠, 옥모란잠 떠고지를 꽂아 성장(盛裝)했다. 당의에 큰머리를 하던 차림이 대한제국 이후에는 원삼에 어여머리를 하였으니 머리장식에서 복식의례의 간소화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절기에 따라 착용하는 의복에 변화를 두어서 더워지기 시작하는 단오에는 여름철 의복인 흰 저고리[고도], 흰 당의, 쟁치마를 입다가 팔월초순이 지나면 초록색 당의로 갈아입었다.
 

참고문헌

김소현(2017), 『조선왕실 여인들의 복식』, 민속원.

한국학중앙연구원편(2016), 『장서각소장고문서대관 7』,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집필자 : 김소현(金素賢), 배화여자대학교]
  • 예복원삼귀인양씨(1917년 이전)
    예복원삼귀인양씨(1917년 이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의친왕비, 귀인양씩 원삼 금박본(20세기)
    의친왕비, 귀인양씩 원삼 금박본(20세기)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봉황흉배본(20세기)
    봉황흉배본(20세기)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설 차림 재현품
    설 차림 재현품
    배화여대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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