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별 한복

왕세자관례복, 王世子冠禮服, Crown Prince’s attire for the coming-of-age ceremony

· 시대 : 조선시대

· 신분 : 왕실 / 남자

· 출처 : 양관 강사포 - 왕세자 재가복 재현품 ( (배화여대 제작) 개인촬영 )/면복 - 왕세자 삼가복 재현품 ( (배화여대 제작) 개인촬영 )/공정책, 직령 - 왕세자 초출복 재현품 ( (배화여대 제작) 개인촬영 )/익선관 곤룡포 - 왕세자 초가복 재현품 ( (배화여대 제작) 개인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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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복 왕세자 관례복 쓰개 공정책 쌍계, 옥잠
겉옷 직령 아청 직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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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복 왕세자 관례복 쓰개 익선관
겉옷 곤룡포 아청 곤룡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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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복 왕세자 관례복 쓰개 양관 팔량관
겉옷 강사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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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복 왕세자 관례복 쓰개 면류관 팔류면
웃옷 곤의 칠장복
아래옷 훈상 칠장복

성인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관례자가 입장하는 것을 초출(初出) 또는 시가(始加)라고 한다. 왕세자가 초출복을 입고 관례의 자리에 나오면 3차례에 걸쳐서 관을 씌우는 절차를 진행했다. 관 씌우기가 끝나면 왕세자에게 술을 권하는 예[초례(醮禮)]를 행하고, 자(字)를 지어주었으며, 관례를 마친 왕세자는 종묘에 가서 알묘례(謁廟禮)를 행하고, 대전, 대왕대비전, 왕대비전, 중궁전에 인사를 드렸다.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왕세자 초출복은 시복(時服), 초가복은 익선관 곤룡포, 재가복은 원유관 강사포, 삼가복은 면류관 면복이다. 조선 초기에 마련된 이 규정은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다만 왕세자 초출복인 시복에 대한 해석에 차이를 보여서 숙종의 관례에는 아청직령(鴉靑直領)에 도대(絛帶)를 띠었고, 효명세자 관례에는 공정책에 도포를 입었으며,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과 대한제국 영친왕의 관례에는 아청직령을 초출복으로 삼았다. 시복이란 평소에 입는 옷이므로 순종의 「관례의대발기」와 영친왕 「관례시 의복발기」에 따르면 왕세자의 초출복을 일남갑사 창의와 아청 숙갑사 직령이 짝을 이루는 1벌로 이해할 수 있다.
왕세손의 관례는 왕세자 관례에 준하여 이루어졌다. 영조 37년에 이루어진 정조의 관례가 한 예로서 초출복으로 아청 직령(鴉靑直領)과 도대(絛帶)를 띠고, 초가(初加)에는 삼조방룡보(三爪方龍補)를 단 흑색 곤룡포(袞龍袍), 재가(再加)에는 7량관 강사포(絳紗袍), 삼가(三加)에는 7류면 5장복의 면복(冕服)을 입었다.
왕자 초출복은 왕세자 초출복과 동일한 직령이며, 초가복은 오사모(烏紗帽)·흑단령(黑團領)차림의 상복, 재가복은 복두(幞頭) 차림의 공복, 삼가복은 양관(梁冠)·조복(朝服)을 갖추었다.
 

참고문헌

『國朝五禮儀序例』, 2卷.

『王世子冊禮謄錄』, 1671, 장서각 소장 K2-2692.

국립고궁박물관(2010), 『영친왕 일가 복식』.

김소현(2016), 「조선시대의 관례복식 재현 연구」, 『한복문화』 19(3), 한복문화학회.

장서각편(1994), 『고문서집성 1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집필자 : 김소현(金素賢), 배화여자대학교]
  • 익종[효명세자]어진(1826년)
    어진(1826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공정책을 쓴 영친왕(20세기 초)
    공정책을 쓴 영친왕(20세기 초)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고종과  왕세자(순종)(1904년 3월 12일)
    고종과 왕세자(순종)(1904년 3월 12일)
    국립고궁박물관 편(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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