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별 한복

공복, 公服, Official attire

· 시대 : 조선시대

· 신분 : 관리 / 남자

· 출처 : 왕세자입학도(1817년)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대분류, 중분류, 소분류, 표제어, 연관어 정보를 제공하는 표
대분류 중분류 소분류 표제어 연관어
관복 공복 쓰개 복두
겉옷 홍포
허리띠 야자대
신발 화(화자) 목화
기타

조선시대 관리들의 예복 가운데 하나로, 국가의 중요한 행사 때 착용하였다. 조선초기에는 초하룻날 모든 관리가 조정에 나아가 왕을 뵐 때, 관리가 왕에게 받은 은혜에 감사를 올릴 때, 국가의 제사를 앞두고 경건한 마음을 맹세하는 의식 때, 설과 동지에 세자궁에 하례할 때 착용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공복제도가 복구되지 않아 착용기회가 줄어들었다. 국혼(國婚) 때 대신들이 착용하거나 조하(朝賀: 경축일에 신하들이 임금에게 나아가 경축하는 일) 진전(進箋) 시에 집사자가 입거나, 왕세자 입학례(入學禮) 때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박사가 공복을 착용하였다. 그 외 과거급제자들이 방방(放榜)할 때와 삼일유가 때 착용하였다.
공복은 복두(幞頭)·포(袍)·야자대(也字帶)·홀(笏)·흑화(黑靴)를 신는다. 복두는 사모와 비슷하나 모정이 평평하고 각이 졌다. 포는 『경국대전』에 1~3품은 홍삼(紅衫), 4~6품은 청삼(靑衫), 7~9품은 녹삼(綠衫)으로 구분되어 있다. 『대전통편(大典通編)』에도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는 조선전기와는 달리, 당상관 홍공복, 당하관 녹공복을 착용하였다. 포의 형태도 전기와는 달리, 옆트인 단령 형태로 변화하였으며 소매는 여전히 넓고 길이도 길었다. 흉배는 달지 않는다. 대군이나 왕자·부마는 혼례 때 홍공복(紅公服)을 착용하였다. 숙종의 3자 연령군(延齡君, 1699~1719)의 홍색 공복이 있는데 안감은 직령 형태의 남색 더그레이다. 『가례도감의궤』 기록에는 정사(正使)와 부사(副使), 혼주[主人]는 홍방사주 공복(안감은 남방사주)를 입고, 빈자(儐者)는 초록 정주(鼎紬) 공복을 입는다고 하였다. 야자품대는 야자대(也字帶) 또는 야대(也帶)라고도 한다. 경국대전에는 공복용 대는 1품은 서대(犀帶), 2품과 정3품은 여지금대(荔枝金帶) 종3품 이하는 흑각대(黑角帶)라고 하였는데 일반 품대와는 달리, 야자대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전선사박물관에는 조선후기 송종오(宋鍾五,1828~1904)가 1888년 장원급제자로 착용한 야자대가 있다. 청색 띠바탕[靑鞓]에 나무에 조각한 나무 띠돈에 금니 칠을 한 것이다. 공복에는 홀을 드는데 4품 이상은 상아로 만든 아홀(牙笏) 5품 이하는 괴목이나 잡목으로 만든 목홀(木笏)을 들었다. 신은 흑피화(黑皮靴)를 신었다. 흑화자(黑靴子) 또는 흑화(黑靴)라고 하기도 한다.
1817년 ≪왕세자입학도≫에 효명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관리 중 박사(博士)의 모습이 보인다. 『태학지(太學志)』에 박사의 공복은 공조(工曹) 제용감(濟用監)에서 마련하며 복두·홍포·야자품대·상홀·흑석(黑舄)을 착용한다고 하였다. ≪왕세자입학도≫의 박사는 복두에 홍포, 야자대, 흑화를 착용하고 있다. 
 

참고문헌

『經國大典』

『續大典』

『大典會通』

국립문화재연구소(2011), 『조선왕조 행사 기록화』.

손윤혜(2012), 「조선후기 왕세자 입학례 복식 고증」, 안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劉頌玉(1991), 『朝鮮王朝 宮中儀軌服飾』, 修學社.

[집필자 : 송미경(宋美京), 서울여자대학교]

연관이미지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빠른 이동 메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