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별 한복

조복, 朝服, Official’s ceremonial attire for happy ceremony

· 시대 : 조선시대

· 신분 : 관리 / 남자

· 출처 : 채제공 초상(1784년) (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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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복 조복 쓰개 양관 금관
겉옷 적초의
겉옷 중단
아래옷 적초상
허리띠 대대
허리띠 품대 서대
기타 후수
기타 폐슬 패대
기타 패옥
버선
신발 화(화자) 흑피화
기타

조복은 나라의 경사스러운 의례에 관원이 입었던 예복이고, 조선후기 제례에서 집사자가 아닌 참여자가 입기도 하였다. 조선전기에는 1품부터 9품까지 모두 착용했지만, 후기는 4품 이상만 입고 5품 이하는 흑단령을 착용하였다. 대한제국시대에는 다시 1품부터 9품까지 착용하도록 제도화되었다. 왕세자도 원유관복을 착용하기 이전인 조선초기에는 양관복을 착용하였다.
조복은 머리에 양관(梁冠)을 쓰기 때문에 ‘양관복’이라고도 하였다. 양관복은 조복뿐만 아니라 제복에도 사용하였다. 조복은 『국조오례의』(1474년)와 『경국대전』(1485년)에 의하면 양관(梁冠), 홀(笏), 적초의(赤綃衣): 上衣), 적초상(赤綃裳: 하상), 대대(大帶), 중단(中單), 패옥(佩玉), 수(綬: 後綬), 폐슬(蔽膝), 혁대(革帶), 말(襪: 버선), 리(履)로 구성되었다. 조복과 제복은 구성요소와 형태가 같지만, 조복에는 방심곡령이 포함되지 않고, 조복 상의는 붉은색이지만 제복 상의는 흑색이라는 점이 다르다.
조복의 양관은 조선전기에 제복용과 같이 검은색을 썼지만, 후기에는 전체 금도금을 해서 ‘금관(金冠)’으로도 불렸다. 상의와 하상의 전체 실루엣은 전기 A자형에서 후기 일자형으로 변한다. 이러한 형태 변화는 하상의 주름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전기에는 하상의 위쪽만 주름을 잡아 치마처럼 아래로 자연스럽게 퍼지는 형태였고, 같이 입는 상의도 품에서 도련까지 점점 넓어지는 형태였다. 그런데 17세기 초반 이후 하상의 주름을 위에서 아래까지 일자로 눌러 잡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이에 따라 같이 입는 상의도 품과 도련 너비가 거의 같은 일자형으로 바뀌었다. 대대는 전기에는 한 가닥의 끈 형태로 만들어서 허리에 둘러 앞쪽에서 양쪽 고를 내고 묶은 후 나머지를 아래로 드리웠지만, 17세기 초반 이후 ∏와 같은 고정된 양식으로 변하였다. 중단은 본래 흰색인데 정조 17년(1793) 흰색 창의(氅衣) 대신 청색 창의로 바꾸도록 했고, 실제 유물도 청색이 다수 나타난다. 창의 외에, 1627년 『원종예장도감의궤』에 의하면 도포도 중단으로 사용되었다. 또 폐슬에 무늬를 수놓은 것이 이 의궤 도식에서 확인되며, 경기도박물관 소장 권우(1610~1675년)묘 출토 유물에서도 확인된다. 신은 조선전기에 신목이 없이 신울만 있는 리[혜]를 신었지만, 중종 3년(1508) 이후 신목이 있는 화(靴)로 바뀌었다. 
 

참고문헌

경기도박물관(2016), 『衣紋의 조선-옷』, 민속원.

장정윤(2003), 「朝鮮時代 文武百官 朝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최연우(2015), 「조선후기 관원 조복의 구성과 형태 연구」, 『韓服文化』 18(3), 한복문화학회.

[집필자 : 최연우(崔然宇), 단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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