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화
· 시대 : 조선시대
· 신분 : 왕실 / 남자
· 출처 : 국조오례의서례(1474년) (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순조어진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원유관복과 통천관복은 왕실의 조복이다. 원유관복은 ‘원유관을 착용할 때의 복식 일습’을 의미하고, 조선시대 왕, 왕세자, 왕세손과 대한제국시대 황태자, 친왕의 복식이다. 통천관복은 ‘통천관을 착용할 때의 복식 일습’을 의미하고, 대한제국시대 황제의 복식이다. 면복 다음 등급의 예복으로, 혼례와 상례의 세부의식, 출궁과 환궁, 조회 등 여러 의식에 사용되었다.
구성요소는 원유관복과 통천관복이 관만 다르고 나머지는 동일하다. 원유관 혹은 통천관, 강사포[강사의], 붉은색 상(裳)과 폐슬, 붉은색 가선을 두른 백색 중단, 붉은색과 흰색으로 만든 대대, 옥대, 수(綬)[후수], 패옥, 적말(赤襪), 적석(赤舄), 청옥규로 구성된다. 근대에 일본인이 그린 고종 통천관복의 신은 화(靴)로 되어 있지만, 고종과 순종의 사진을 보면 석(舃)을 신은 것이 확인된다.
한편, 원유관과 강사포는 항상 짝이 되는 것으로 인식되어왔지만, 강사포를 입을 때 원유관이 아닌 익선관을 쓰는 경우가 있음도 확인되었다. 익선관에 강사포 차림은 원유관에 강사포보다는 가볍고 익선관에 곤룡포보다는 중(重)한 차림으로 착용하였다.
관은 검은색이고, 정수리에 있는 옥을 꿴 줄로 12량, 9량, 8량, 7량을 구분하였다. 12량은 통천관인데 황제가 썼다. 9량 이하는 원유관인데, 9량 원유관은 조선시대 왕과 대한제국 황태자, 8량은 조선시대 왕세자와 대한제국 친왕, 7량은 조선시대 왕세손이 사용하였다. 왕의 원유관은 고려말 공민왕때 명나라로부터 유입되었으나 7량관이었고, 세종 20년(1438) 9량관이 유입되어 조선후기까지 착용되었다. 왕세자의 원유관은 중종 17년(1522) 처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7량관이었다. 왕세자의 원유관이 8량으로 기록에서 확인되는 것은 『국조속오례의보서례』에서이고, 이 책에서 왕세손의 원유관이 7량으로 규정되었다. 관례를 올리지 않은 미성년자는 원유관 대신 공정책을 착용하였다.
『國朝五禮儀序例』 卷2 「嘉禮」 ‘冠服圖說’
『國朝續五禮儀補序例』 卷2 「嘉禮」
溫少華⋅최연우(2021), 「명대 황실 관례의 행례 특성 및 신분별 관례복 연구-조선의 ‘익선관강사포’에 대한 논의를 겸하여-」, 『한국의류학회지』 45(2).
최연우(2018), 「조선시대 원유관복 연구-조선전기 왕세자 원유관복 제정을 중심으로-」, 『한복문화학회 2018년 춘계학술대회 논문초록집』, 한복문화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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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제 12량 통천관복 착용 어진(고종) (1918년 추정)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대한제국 황제 12량 통천관복 (좌: 고종, 우: 순종) (1937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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