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별 한복

일상복Ⅲ, 日常服Ⅲ, Everyday clothesⅢ

· 시대 : 조선시대

· 신분 : 상류층 / 남자

· 출처 : 설야연적도(18세기)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평안감사향연도(18세기)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대분류, 중분류, 소분류, 표제어, 연관어 정보를 제공하는 표
대분류 중분류 소분류 표제어 연관어
일상복 일상복 쓰개 흑립
겉옷 대창의
겉옷 중치막
허리띠 세조대 동다희, 술띠
신발
신발 나막신

조선후기 상류층 남자는 외출할 때 갓을 쓰고 대창의 또는 중치막을 입고 세조대를 두르고 혜를 신었다. 대창의[창의]와 중치막은 각각 뒷중심과 양 옆에 트임이 있어 활동하기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소매가 넓어 위의도 갖출 수 있어 상류층 남자의 일상복으로 널리 착용되었다. 대창의는 도포의 뒷자락을 생략하여 만든 포로서 도포와 유사하나 도포보다 훨씬 간편하게 입을 수 있었다. 양 옆에 넓고 긴 삼각형 무가 달려 있어 아랫자락 폭이 넉넉한데다 뒷중심까지 길게 트여 있어 걷거나 앉거나 말을 탈 때 불편함이 없었다. 대창의는 옆이 막혀 있어서 옆이 트인 단령 안에 받쳐 입었을 때 단령 밖으로 속옷이 보이지 않아 체면을 차릴 수도 있었다. 대창의는 주로 고급 비단으로 만들었고, 녹색ㆍ남색ㆍ청색ㆍ백색 등이 사용되었다. 중치막은 뒤가 트인 대창의와 달리 양 옆이 길게 트여 있다. 양 옆에 달린 삼각형 무는 점점 축소되거나 없어지게 되었고 소매는 점점 넓어져 두리소매로 변하였다. 삼각형 무가 없어지게 되면서 아랫자락 폭이 좁아졌는데 아래자락이 거추장스럽지 않아 몸을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중치막은 주로 솜옷과 누비옷으로 만들었고, 백색ㆍ옥색ㆍ남색ㆍ초록색 등이 사용되었다. 대창의와 중치막을 입은 후 외출할 때는 갓을 썼고, 추울 때는 풍차를 쓰고 그 위에 갓을 쓰기도 하였다. 신은 주로 혜를 신었으나 비가 오거나 땅이 젖었을 때는 나막신을 신기도 하였다. 가슴부분에 양 끝에 딸기술이나 봉술이 달린 세조대를 둘렀는데, 신분에 따라 당상관은 홍색 또는 자색, 당하관은 청색 또는 녹색을 사용하였다.  
 

참고문헌

금종숙(2014), 「조선시대 중치막 착용례와 형태 연구」, 『복식문화연구』 22(5).

김문자(2003), 「조선시대 나막신에 대한 연구」, 『한국패션비즈니스학회』, 7(2).

단국대학교출판부(2008), 『정사공신 신경유공묘 출토 복식』.

안명숙(2017), 「출토 창의류의 형태적 특징과 구성에 관한 연구-전남지역 출토 창의류를 중심으로-」, 『남도민속연구』 39, 남도민속학회.

이은주⋅조효숙⋅하명은(2005), 『17세기의 무관옷 이야기』, 민속원.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2006), 『최원립 장군묘 출토복식을 통해 본 17세기 조선 무관의 차림새』.

[집필자 : 이주영(李珠英), 동명대학교]
  • 풍속화, 야연(18세기)
    풍속화, 야연(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풍속도(18세기)
    풍속도(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팔기도(18~19세기)
    팔기도(18~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풍속산수화(18세기)
    풍속산수화(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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