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화
· 시대 : 조선시대
· 신분 : 일반 / 남자
· 출처 : 설야연적도(18세기)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성협풍속화첩, 노상풍정(19세기)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설야연적도(18세기)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조선시대에는 추위를 막기 위하여 방한모를 쓰고, 바지⋅저고리는 물론 겉옷을 솜옷이나 누비옷으로 만들어 입기도 하였고, 옷감 외에 동물의 가죽이나 모피[털]로 만들어 입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일반 남자들이 썼던 대표적인 방한모는 휘항과 풍차이다. 남자의 겉옷은 형태상 옷깃에 털을 붙이거나 옷깃을 올려 입을 수 없었고 갓이나 소모자만으로는 찬바람을 막을 수 없었다. 조선 전기에는 추위에 가장 민감한 귀를 감싸기 위해 이엄(耳掩)을 썼으나 조선후기에는 휘항과 풍차를 많이 썼다. 휘항은 앞이마, 귀, 머리, 어깨, 등까지 모두 덮을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넉넉하였다. 풍차는 남바위에 볼끼가 달려 있는 형태로서 휘황보다 크기는 작지만 귀와 뺨, 턱, 어깨까지 덮을 수 있어서 추위를 막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풍차에 달린 볼끼는 사용하지 않을 때는 뒤로 젖혀 뒤통수에서 묶을 수 있었으므로 풍차는 휘황보다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휘황과 풍차는 상투를 틀고 탕건이나 소모자를 쓴 다음 그 위에 썼고, 외출할 때는 휘황과 풍차 위에 갓을 쓰고 혜를 신었다. 휘황과 풍차는 모두 정수리 부분이 트여 있는데 정수리 부분의 트임 사이로 탕건이나 소모자가 온전하게 솟아나올 수 있어서 눌리거나 망가지지 않았다. 남자들은 일상복으로 대창의와 중치막을 많이 입었는데, 방한을 목적으로 입을 때는 겨울용 옷감인 비단으로 만들거나 솜옷이나 솜누비옷으로 만들어 입었다. 방한복으로 동물의 가죽이나 모피로 만든 갖옷, 즉 구의(裘衣)도 입었는데, 주로 사슴⋅개⋅양⋅토끼⋅표범⋅담비 등의 가죽이나 모피가 사용되었다. 갖옷은 두루마기⋅방령포(方領袍)⋅저고리⋅마고자⋅배자 등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모피가 있는 경우 모피를 안쪽 또는 겉쪽에 대기도 하였고 옷의 전체 또는 일부에 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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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도, 야연, 가두매점(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풍속화(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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