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화
· 시대 : 고려시대
· 신분 : 관리 / 남자
· 출처 : ( 강민첨(∼1021)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 ( 공복착용 모습, 최충(984~1068) 초상, 홍천군 노동서원 소장 )/ ( 공복착용 모습 최유선(1075년, 문종 29) 초상 -최유선(崔惟善)초상 뒷면에 영조 24년(1748)에 원본을 모사했다고 밝힘 홍천군 노동서원 소장(해주최씨 대종회) )/ ( 공복착용 모습 최유선 초상(崔惟善) 초상 제작시기 : 1793 )/ ( 공복착용 모습 지장시왕도(14세기), 일본 정가당문고미술관소장 )
대분류 | 중분류 | 소분류 | 표제어 | 연관어 |
---|---|---|---|---|
관복 | 공복 | 겉옷 | 공복 |
공복은 고려시대 관리의 관복이다. 목선이 둥근 단령을 입는데 길이가 발목에 이르고 소매가 넓으며, 품계나 직책에 따라 겉옷 색을 달리하였다. 머리에는 좌우의 날개가 일자로 되어 있는 전각복두(展脚幞頭)를 쓰고 허리띠는 옥대, 금대, 서대, 각대 등으로 품계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홀은 상아홀과 목홀로 계급을 구분했다. 현재까지 고려의 공복이 실물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문헌기록이나 고려시대의 불화, 많지 않은 초상의 공복착용 모습을 통하여 그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고려시대 공복의 시작은 광종 11년(960)에 후주의 공복제도에 따라 고려백관의 공복제도를 규정했다. 원윤(6품) 이상은 자삼(紫衫:보라계열)을 입도록 하고, 관직의 직위 따라 중단경(중앙행정기관 단과 경) 이상은 단삼(丹衫:붉은계열), 도항경(서경의 행정기관, 서경에 설치된 도항사의 경) 이상은 비삼(緋衫:엷은 붉은계열), 소주부(지방 관청의 규모가 작은 주부정도) 이상은 녹삼(綠衫:녹색계열)을 입도록 하여 중앙행정과 지방행정을 구분하고 관리의 직위를 복색으로 구분하였다. 고려 의종(1146~1170) 때의 의례상정(儀禮詳定)에 있는 관복의 기록을 보면 “문관 4품 이상은 자색 옷[服紫]에 붉은 띠[紅鞓]를 띠고 금어(金魚: 허리띠에 다는 물고기 모양으로 된 장식품. 직위에 따라 재료를 달리 한 금어, 은어(銀魚), 동어(銅魚), 목어(木魚) 등이 있는데 이를 어부(魚符)라고 함)를 차며[佩金魚] 상참관(常參官:수시로 또는 정기적으로 왕을 만나 국사를 의논할 수 있는 관원) 6품 이상은 옅은 붉은색(緋紅) 옷에 붉은 띠[紅鞓]를 띠고 은어(銀魚)를 차는데 관직이 아직 6품 이상 되지 못했더라도 왕명으로 특별히 허가받은 자는 이에 구애되지 않는다. 라고 되어 있으며, 9품 이상은 녹색 옷[服綠]을 입고 각문(閣門:통례문∼부서 이름)의 무신(武臣)들은 다 자색 옷을 입으나 어부(魚符)를 차지 못하며 내시(內侍), 다방(茶房) 등의 관원들도 규정한 정복 이외에는 모두 자색 옷을 입으며, 어부는 차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또 1123년『고려도경』에 관리의 복식을 등급 순으로 나누어 설명한 내용이 있는데, 이를 보면 1~2품의 영관(令官), 국상(國相), 3~4품 근시(近時), 종관(從官)의 복식은 모두 자문라포(紫文羅袍: 자색의 무늬 있는 견직물 포)에 사(紗: 조직이 성근 견)로 만든 복두(幞頭 : 검은색 모자)를 쓰고, 허리에는 옥대(玉帶)와 금대(金帶)를 하였다. 단 등급의 따라 허리띠의 재질과 무늬를 다르게 하였는데, 영관은 옥대(玉帶)에 금어(金魚), 국상은 구문금대(毬文金帶 : 둥근무늬 장식 금대)에 금어, 근시는 어선금대(御仙金帶 : 어선꽃 무늬 장식한 금대)에 금어, 종관은 어선금대(御仙金帶)를 한다고 하였다. 그 다음 5~6품에 해당하는 경감(卿監)과 7~9품에 해당하는 조관(朝官)의 복식은 비문라포(緋文羅袍 : 붉은색 무늬 있는 견직물 포)를 입고, 허리띠의 경우 경감은 홍정서대(紅鞓犀帶 : 홍색바탕의 무소뿔 장식 허리띠)에 금어, 조관은 홍정각대(紅鞓角帶: 홍색바탕의 검정 뿔 장식 허리띠)에 금어장식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서관복(庶官服)은 포(袍)가 아닌 “녹의(綠衣 : 녹색 긴저고리)에 목홀(木笏 : 나무재질의 손에 쥐는 네모난 판)을 들고, 복두(幞頭)를 쓰고, 오화[烏鞾: 목이 긴 검은 가죽신]을 신는다.” 하였다. 관리의 공복은 포의 색과 허리띠의 장식에 차이를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복의 색은 광종 때 자단비녹(紫丹緋綠)의 4색공복 이었던 것이 의종 때와 고려도경이 쓰여진 1123년(인종 1)에는 단색이 빠진 자비녹(紫緋綠)의 3색 공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백관의 공복은 강민첨(∼1021) 초상, 최충(984~1068)과 그의 아들 최유선(~1075)의 초상과 고려 불화에서 그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강민첨의 초상은 정조 12년(1788) 모사된 것이라고 초상 위편에 기록되어 있다. 자색의 단령포에 복두는 전형적인 전각복두를 쓰고 있으며, 홍색의 얇은 복두 끈이 표현되어 있다. 다음은 최충(984~1068)과 그의 아른 최유선(~1075)의 초상에서의 공복차림으로 전각복두에 짙은 녹색의 단령포를 입고 손에는 상아홀을 들고 있다. 후대에 그려지면서 고려시대 공복기록의 색과 차이가 있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14세기의 일본 정가당문고미술관 소장의 ‘지장시왕도’에 관리의 공복차림은 회색과 녹색의 단령포를 입고 있는데 깃이 좁고 포의 하단에 가로선이 있는 난(襴)이 있는 형태이다. 왼쪽의 회색의 포를 입고 있는 이는 상아홀을 녹색에 포를 입이는 목홀을 들고 있어 서로 차이가 있으며 포의 길이는 비색 포가 길어 발목에 이른다. 허리띠는 두 사람 모두 홍정을 띠었는데 위 아래로 둘러 아래쪽 중심에 결합쇠[대구(帶鉤)]가 오도록 하고 허리띠의 남은 길이는 옆으로 늘였다.
동아대학교석당미술원국역(2011), 「고려사」, 경인문화사
지은이 서긍, 옮긴이 조동원(2005) 「고려도경」, 황소자리출판사
이승해(2011), 「고려시대 官服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
강민첨(∼1021)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
공복착용 모습, 최충(984~1068) 초상, 홍천군 노동서원 소장 -
공복착용 모습 최유선(1075년, 문종 29) 초상 -최유선(崔惟善)초상 뒷면에 영조 24년(1748)에 원본을 모사했다고 밝힘 홍천군 노동서원 소장(해주최씨 대종회) -
공복착용 모습 최유선 초상(崔惟善) 초상 제작시기 : 1793 -
공복착용 모습 지장시왕도(14세기), 일본 정가당문고미술관소장
연관이미지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