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별 한복

공복 公服

· 시대 : 고려시대

· 신분 : 왕 / 남자

· 출처 : ( 전 공민왕(1330-1374)과 노국공주 초상 부분, 국립고궁박물관 )/ ( 전 공민왕과 노국공주 초상 부분, 경기도박물관 )

대분류, 중분류, 소분류, 표제어, 연관어 정보를 제공하는 표
대분류 중분류 소분류 표제어 연관어
관복 공복 겉옷 공복

공복은 왕이 관원과 사민을 만날 때, 사신을 접견할 때 착용하던 복장이다. 머리에는 양각이 옆으로 길게 뻗은 전각복두(展脚幞頭)를 쓰고, 옷은 깃이 둥근 단령에 소매는 넓고 길다. 손에는 옥홀을 들고, 허리에는 붉은 색 허리띠를 띠며, 신은 목인 긴 화를 신는다. 공복은 광종 11년(960)에 후주의 공복제도에 따라 백관의 공복제도를 만들었는데, 왕의 공복에 대해서는 특별히 규정된 기록은 없다. 『고려사』<왕 관복조>에 문종 32년(1078) 6월 송나라 신종이 보내온 의복에 공복이 있다. 이를 보면 자화라겹공복(紫花羅裌公服) 일령(一領), 양라한삼(良羅汗衫) 일령(一領)과 함께 홍화라수겹삼첨(紅花羅繡夾三襜) 일조(一條), 예복 앞에 드리우는 치레의 하나인 홍화라수겹삼첨(紅花羅繡夾三襜) 일조(一條), 홍화라수(홍색비단에 수를 놓은) 겹포두(紅花羅繡夾包肚) 일조(一條), 홍색의 무늬 있는 비단에 수를 놓은 허리띠인 홍화라수륵백(紅花羅繡勒帛) 일조(一條), 백면능겹고(白緜綾夾袴) 일(一), 목이 긴 신인 화(靴) 일량(一緉), 홍라수겹복(紅羅繡夾複) 이조(二條), 허리띠인 요대(腰帶) 이조(二條)로 두 개의 요대 중 하나는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위아래로 도합 10개를 새겨 넣은 옥과 대모를 붙이고 금장식을 못으로 고정시킨 홍정(紅鞓)과 무소뿔 재질에 17개의 벼이삭을 잘게 새겨 넣은 뒤 그 위에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위아래로 도합 10개 새겨 넣은 무소뿔[透犀]과 대모로 붙이고, 금장식을 못으로 고정한 홍정이다. 또 다른 기록인 1123년 『고려도경』에 의하면 왕이 중국 사신을 만날 때는 자라공복(紫羅公服)에 상홀(象笏: 상아 재질의 손에 드는 긴 판)과 옥대(玉帶: 옥장식 허리띠)를 착용한다 하여 고려시기 왕이 공복을 착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내용으로 보면 왕의 공복은 자화라공복, 자라공복으로 라(羅)직물을 사용한 자색임을 알 수 있고, 허리띠는 옥장식 또는 무소뿔 장식의 붉은 색 띠인 홍정이며, 관모는 복두임을 알 수 있다.
왕의 공복착용 모습은 공민왕(재위 1724∼1776)과 노국대장공주의 초상에서 확인되는데 검은색의 전각복두를 쓰고, 포는 기록대로라면 자색이라 하였으나 초상에서는 홍색으로 보이며, 가장자리는 검은색 연(緣:선)이 둘러져 있는데 이는 고려 후기의 특징으로 짐작된다. 소매는 폭이 넓어 길이가 앉아 있는 발목에 이른다. 포의 소매 끝으로 살짝 나와 있는 소색 소매는 소매를 길게 연장한 한삼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왼쪽 아래 옆선으로 트임이 확인된다. 홀을 들고 있는데, 경기도박물관 소장본에는 상아로 보이는 백색 홀을 들고 있는 반면, 고궁박물관 본은 검은 또는 갈색의 홀을 들고 있어 차이를 보이는데 전체적으로 채색이 명확하지 않은 면이 있다. 허리에는 꽃무늬 장식이 있는 허리띠를 배 아래에 맨 모습이다. 신은 흑색의 화를 신고 있다. 이 두 초상은 후대에 그려진 것으로 실제 고려말 공민왕의 공복과 일치한다. 라고는 볼 수는 없으나 공복의 기본 구성을 갖추고 있어 왕의 공복연구에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동아대학교석당미술원국역(2011), 「고려사」, 경인문화사

지은이 서긍, 옮긴이 조동원(2005) 「고려도경」, 황소자리출판사

유희경 김문자(1998), 「한국복식문화사」, 교학사

[집필자 : 정미숙(鄭美淑), 실학박물관]

  • 전 공민왕(1330-1374)과 노국공주 초상 부분, 국립고궁박물관

  • 전 공민왕과 노국공주 초상 부분, 경기도박물관

연관이미지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빠른 이동 메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