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별 한복

조복 Jo-bok

· 시대 : 고려시대

· 신분 : 관리 / 남자

· 출처 : ( 고려 관리의 조복 경기도 개풍군 수락암동 1호분 벽화 조복차림의 12지 신상 )/ ( 고려 관리의 조복 경기도, 파주 서곡리, 권준1280-1352 묘 )/ ( 고려 관리의 조복 경기도, 파주 서곡리, 권준1280-1352 묘 )/ ( 관리의 조복 공민왕릉 벽화(12지상),12지신상, 벽화, 공민왕릉, 14세기, 개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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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복 조복 겉옷 조복

고려시대 백관의 조복에 대한 기록으로 『고려사』에 공민왕 21년(1372) 11월 왕이 백관의 조복에 대한 교서에 상아홀(象牙笏), 홍정(紅鞓:대의 색이 붉은), 조정(皂鞓: 대의 색이 검은), 초라조복(綃羅朝服: 초나 라조직으로 직조한 비단)은 모두 본국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니 이후로는 시신(侍臣) 이외의 동반(東班)과 서반(西班) 5품 이하는 목홀(木笏:나무 홀)·각대(角帶: 뿔 재질 장식의 대)에 명주나 모시로 만든 조복[紬苧朝服]을 입도록 한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하여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시신은 고급의 초라조복과 상아홀, 붉은색 허리띠인 홍정을, 동서반 5품 이하는 상아홀 대신 나무홀을, 홍정 대신 각대를 사용하고 초라조복 대신 주저조복을 입으라는 것을 통하여 관리 역시 재료에서 차이를 두어 조복을 착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사』에 우왕 12년(1386) 정당문학 정몽주를 명나라로 보내 임금의 편복(便服), 신하가 입는 조복(朝服)과 편복을 요청한 기록이 있어 이때까지 명으로부터는 정식으로 조복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백관의 조복은 수락암동 1호분 십이지신상에서 확인된다. 넓은 대수 포에 잠두가 큰 비녀를 꽃은 양관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 파주 서곡리, 권준(1280-1352) 묘의 벽화에 그려진 그림은 대수포에 홀을 들고 있는 모습은 머리에 쓴 관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정황상 조복차림으로 볼 수 있다. 공민왕릉 벽화의 12지신상에서 보이는 조복에서도 고려시대 관리의 조복차림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동아대학교석당미술원국역(2011), 『고려사』, 경인문화사

김문자(2015), 『한국복식사 개론』, 교문사

[집필자 : 정미숙(鄭美淑), 실학박물관]

  • 고려 관리의 조복 경기도 개풍군 수락암동 1호분 벽화 조복차림의 12지 신상

  • 고려 관리의 조복 경기도, 파주 서곡리, 권준1280-1352 묘

  • 고려 관리의 조복 경기도, 파주 서곡리, 권준1280-1352 묘

  • 관리의 조복 공민왕릉 벽화(12지상),12지신상, 벽화, 공민왕릉, 14세기, 개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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