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별 한복

일상예복, 日常禮服

· 시대 : 삼국시대, 통일신라

· 신분 : 일반 / 여자

· 출처 : ( 용강동 출토 여자 토용 )/ ( 용강동 출토 여자 토용 )/ ( 용강동 출토 여자 토용 )/ ( 용강동 출토 여자 토용 )/ ( 용강동 출토 여자 토용 - 여자상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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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복 일상예복 겉옷 여자 예복

용강동 고분은 통일신라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중기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용강동에서 출토된 여자 토용은 머리는 위로 올리고, 저고리 위에 치마를 입었으며, 그 위에 어깨걸이[숄(shawl), 표(裱)]를 두르기도 하였다.
『三國史記』에 흥덕왕 9년(834) 진골부터 평민까지 복식에 관하여 규정한 기록이 있다. 이에 따르면 통일신라 여성이 착용한 복식의 명칭은 표의(表衣), 내의(內衣), 반비(半臂), 고(袴), 표(裱), 배당(褙襠), 단의(短衣), 표상(表裳), 요(䙅), 반(襻), 내상(內裳), 대(帶), 말요(襪袎), 말(襪), 리(履), 소(梳), 채(釵), 관(冠) 등이다. 이 용어들이 어떤 복식을 칭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우므로 현재 널리 사용되는 치마, 저고리 등으로 표기하였다.
머리는 모두 정수리 위로 올린 머리에 장식을 더한 것으로 보인다.
여자 토용 모두 저고리 위에 치마를 착용하였다. 저고리 길이는 치마에 가려져 확인할 수 없고, 소매 너비는 대개 비슷한데 그중 특히 넓은 것이 한 건 있다. 여자 토용 모두 손을 모으고 있는데 모두 옷소매로 손을 가리고 있고, 소매에 주름이 많이 표현된 것으로 보아 현재 저고리보다 길이가 길 것으로 보인다.
치마는 저고리 위에 착용하였다. 치마말기에 어깨끈 두 개가 양쪽으로 달려있다. 치마 길이는 모두 발을 덮고 땅에 닿을 정도이다. 치마폭은 풍성하고 치마폭에 주름이 표현되어있는데, 치마말기에서 아래로 퍼지는 주름이다.
치마 앞에 길게 늘어뜨린 끈 두 자락은 치마말기를 묶고 아래로 내려뜨린 것으로 추정된다.
여자 토용 중 크기가 큰 2건만 어깨걸이를 착용하였다. 토용의 크기와 복식의 형태로 미루어 어깨걸이를 걸친 토용이 다른 토용에 비하여 신분이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치마에 가려져 속에 착용한 옷과 신 등은 확인할 수 없다.  

참고문헌

고부자(2000), 「경주 용강동출토 토용복식고」, 「고고역사학지』 Vol.16, 동아대학교 박물관.

권준희(2001), 「신라 복식의 변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김문자(2015), 「한국복식사개론」, 교문사.

문화재연구소 경주고적발굴조사단(1990), 「경주용강동고분 발굴조사보고서」

[집필자 : 남경미(南瓊美), 원광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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