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표준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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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명 수릉(首陵) 이라고도 한다. 김해김씨의 시조이다. 탄생과 치적에 관하여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린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전해지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직도 나라가 없던 시절에 가락지역에서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는데, 3월 어느 날 하늘의 명을 받아 9간(九干 : 族長) 이하 수백 명이 구지봉(龜旨峰)에 올라

 화엄종(華嚴宗)의 시조. 644년(선덕여왕 13) 황복사(皇福寺)에서 중이 되었다. 661년(문무왕 1) 원효와 같이 입당구법의 길을 떠났다. 당주까지 갔다가 원효는 느낀 바가 있어 가지 않고, 혼자 서사불퇴(誓死不退)의 결심을 갖고 해로(海路)로 당나라에 가서 지엄(至嚴)의 문하에서 화엄종(華嚴宗)을 연구하고, 당이 신라를 치려하자 이를 알리고

 호는 회정당(晦靜堂), 본관 청풍(淸風). 1624년(민조 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고, 1638년(인조 16)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도승지로 임명되고,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갈 때 보양관(輔養官)으로 수행하고 귀국하여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취임하였다. 1649년(효종 즉위) 대사헌을 거

 자는 경홍(景洪), 호는 석봉(石峯), 본관은 삼화(三和), 개성(開城)출신.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격려로 서예(書藝)에 정진하여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의 필법(筆法)을 익혀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등의 각 체에 모두 뛰어났다. 그때까지 종국의 서체(書體)와 서풍(書風)을 모방하던 풍조(風潮)를 벗어나 독창적인 경지를

 이름을 대정(大正) 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재상을 지낸 문량(文亮)이다. 745년(경덕왕 4) 이찬(液)으로 중시가 되었으며 750년에 물러났다. 그 뒤 불국사와 석굴암의 창건공사를 주관 하였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한국민족문화의 가장 창의적인 문화유산의 정수이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한국의 건축사나 조각사 조경사(造景史)에 있어서 그전에는 전혀

 호는 무극(無極), 목암(睦庵). 성은 김(金). 이름은 견명(見明), 일연은 자(字), 초자는 회연(晦然), 언필(彦弼)의 아들로 경상도 경산(慶山) 출신이다. 1214년(고종 1) 9세 때 해양(海陽)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서 학문을 닦다가, 1219년 대웅(大雄)에게서 수계(受戒)를 받고 중이 되었다. 1227년 승과(僧科)에 급제, 12

의천은 자(字), 문종의 넷째 아들, 1065년(문종 19) 왕사(王師) 난원(爛圓)에게서 중이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영통사(靈通寺)에 있으면서 난원으로부터 화엄(華嚴)의 교관(敎觀)을 배웠다. 난원이 죽은 뒤에 그 제자들과 학문을 연구하며 당시의 계율(戒律), 열반(涅槃), 원융(圓融), 선적(禪寂) 등 각 종(宗)의 학승(學僧)을 모아 불도(佛道

 초명(初名)은 유(裕). 호는 회헌(晦軒). 홍주(지금의 영주) 출생,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270년 삼별초난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하여 왕의 신임을 받았다. 1275년(충렬왕 1)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있을 때, 백성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하며, 민풍(民風)을 쇄신하려 노력하였다. 1286년

 호는 역옹, 본관은 경주(慶州).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成均試)에 장원,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등용, 삼사판관(三司判官) 등을 역임, 1314년(충숙왕 1) 백이정의 문하에서 정주학(程朱學)을 공부, 이 해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이 만권당(萬卷堂)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燕京)에 가서 원나라 학자 요수염(姚燧閻), 조맹부 등과

 호는 서애(西厓), 본관은 풍산(豊山), 이황(李規)의 문인. 156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69년(선조 2)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 이조좌랑(吏曹佐郎)을 역임하고, 1580년에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자원하여 향리의 노모를 봉양하다 부제학이 되었다. 1582년 도승지(都承旨), 대사헌을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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