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표준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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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6년 좌평(佐平)으로 있을 때 의자왕이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승하여 자만과 주색에 빠지자 나라가 위태로워짐을 주간하다가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단식을 하다가 죽음에 임박하여 왕에게 글을 올리기를「충신은 죽더라도 임금을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죽으면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신(臣)이 항상 시세의 흐름을 볼 적에 멀지 않아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

 648년 황룡사(皇龍寺)에서 중이 되었으며, 각종 불전(佛典)을 공부하며 수도에 정진하였다. 집을 불문에 희사하여 초개사(初開寺)를 세우고, 자기가 데어난 자리에 사라사(沙羅寺)를 세웠다.  661년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에 가서 공부하려고 길을 떠났다. 밤이 늦어 남양주 부근의 한 무덤에서 하룻밤을 자게 됐는데, 밤중에 갈증이

 본관 전주(全州). 함경도 영흥(永興) 출신. 1356년(공민왕 5)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내부(來附) 한 뒤,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이 되었다. 1364년 원나라가 평안도에 침입하여 공민왕을 폐하려 하자 최영(崔瑩)과 함께 이들을 달천강(撻川江)에서 대파하였다. 1377년(우왕 3) 왜구(倭寇)가 개경을 위협하자 서강부원수(西江副元帥)로서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 본관은 장수(長水),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군서(君瑞)의 아들. 개경(開京 ; 開城) 출신. 1376년(우왕 2)음보(蔭補)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고, 138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389년(창왕 1) 문과(文科)에 급제, 이듬해 성균관 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단군왕검(檀君王儉), 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고도 한다. 친제(天帝)인 환인(桓因)의 손자이며 환웅(桓雄)의 아들로서, 서기전 2333년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단군에 관한 기록으로는 <삼국사기>, <제왕운기>, <응제시주>,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나타나고 있다. &

 충남 예산(禮山) 출신. 어려서부터 사람됨이 준수하고 담력이 강했으며, 3.1 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적 분개를 느끼고, 식민지 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자퇴하고, 서당에서 독학으로 공부하여 국사와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23세에 "장부는 뜻을 이루기전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굳은 결심으로 중국 청도(靑島)로 망명하였다. &nbs

 충남 천안시(天安市) 병천면(竝川面) 출신.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나라사랑의 의지가 두터웠으며, 1918년 여자 전교사의 소개로 이화학당(梨花學堂) 고등과 교비생으로 입학하였다. 이듬해 3.1 운동이 발발하자 학생들과 함께 가두로 뛰쳐나가 만세시위를 벌였고, 일제 총독에 의하여 강제로 학교가 휴교에 들어가자, 고향에서 만세시위를 지휘하기 위하여 독

 역대 왕조 중 가장 강성하고 대륙적 기상이 웅비했던 고구려의 왕으로서 ‘광개토대왕’이란 칭호는 땅을 널리 개척한 임금이란 뜻으로, 생존 시에는 영락대왕으로 불리었다. 어려서부터 영웅적 기상과 웅대한 포부를 가진 대왕은, 아버지 고국양왕이 죽자, 391년 18세의 나이로 왕에 즉위하였다.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국력신장에 진력하고, 군사훈련 강화 및

 이름은 법민(法敏),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맏아들. 어머니는 김유신(金庾信)의 누이인 문명왕후(文明王后) 김씨. 비(妃)는 파진찬 선품(善品)의 딸 자의왕후(慈儀王后)이다. 법민은 외모가 뛰어나고 머리가 총명하며 지략(智略)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650년(진덕여왕 4) 왕명으로 당(唐)나라에 가서 대부경(大府卿)의 벼슬을 받았고, 654년(무

 성은 김(金), 이름은 춘추(春秋). 이찬 용춘(龍春 : 龍樹)의 아들.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 김씨(金氏)이다. 642년(선덕여왕 11)백제의 침입으로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되고, 사위인 성주(域主) 품석(品釋)이 죽음을 당하자, 고구려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치고자 고구려에 가서 연개소문(淵蓋蘇文)을 만났으나, 국경의 영토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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