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인물탐방

자연의 빛깔을 머금은 먹 안에 고유의 역사를 담아내다 전통먹 숙련기술자 한상묵 먹장
등록일 2021-03-31 조회수1670
자연의 빛깔을 머금은 먹 안에 고유의 역사를 담아내다 전통먹 숙련기술자 한상묵 먹장

자연의 빛깔을 머금은 먹 안에 고유의 역사를 담아내다 전통먹 숙련기술자 한상묵 먹장

한상묵 먹장(墨匠)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전통방식으로 먹을 제작하는 장인이다. 자료수집 조차 녹록치 않은 상황에서 전통먹을 재현해냈으며 우수한 기술을 인정받아 문화재청을 포함해 여러 업체와 활발히 협업 중이다. 예로부터 먹을 만드는 먹방이 있어 묵뱅이, 또는 먹뱅이라 불렸다는 동네답게 연두빛 신록이 무성하고 아침 공기가 청량하다, 사람 좋은 웃음으로 취재진을 맞이하는 한상묵 먹장의 뒤를 따라 공방에 들어서니 그간 받은 상장부터 각종 먹, 먹으로 만든 조형물들이 빼곡해 인고의 시간을 짐작케 한다.

interview

2006년 먹제조 부문에서 ‘경기 으뜸이’, 2014년 전통먹 숙련기술전수자로 선정된 바 있는 한상묵 먹장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전통기법으로 먹을 제조한다. 전통기법이란 석유나 천연가스 정제 과정에서 추출한 그을음인 카본(Carbon)이 아닌 송진, 콩기름, 참기름 등 식물성 기름을 활용해 수작업으로 먹을 생산하는 방식을 뜻한다. 국내에 단 한 사람도 전통먹을 만드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이 여겼던 그는 젊은 시절부터 독학의 힘으로 전통먹의 제조기법을 익히기 위해 가시밭길도 마다않고 묵묵히 먹장 외길인생을 걸어왔다.

경북 영양군 수비면에서 발굴된 전통가마터를 재현한 가마 앞에서. 한상묵 먹장은 이 가마와 계량가마 2개를 사용한다. ©디자인밈경북 영양군 수비면에서 발굴된 전통가마터를 재현한 가마 앞에서. 한상묵 먹장은 이 가마와 계량가마 2개를 사용한다. ©디자인밈
식물성 기름으로 손수 먹을 만드신다.
특히 소나무를 재료로 한 송연먹에 주력하시는 이유는 뭔가요?

현재 국내에서 판매하는 거의 대부분의 먹과 먹물은 카본으로 제작되는 실정이지만 이곳 취묵향에서 생산하는 먹은 소나무 그을음으로 만든 송연먹(松煙墨)과 식물성 기름으로 만든 유연먹(油煙墨)이 대표적입니다. 송연먹은 푸른빛이 돌아 산수화 등 그림에 잘 어울리고 붉은빛이 나는 유연먹은 주로 서예에 사용되죠. 우리 선조들은 소나무로 만든 초가집, 기와집에서 태어나 소나무 숲에서 뛰놀고 솔가지로 만든 밥을 먹고 군불도 떼다가 소나무 관(棺)에 묻히기까지 일평생을 소나무와 함께 했어요. 소나무를 태워 먹도 만들었지요. 사실 먹은 신라때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수출품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신하들에게 먹을 나누어 주었고, 특정지역에서는 먹을 임금님께 진상품으로 올리기도 했죠. 송연먹이 지닌 두터운 먹색은 빛의 반사가 적고 깊이감이 있습니다. 요즘에도 많은 작가들이 송연먹을 찾는 이유예요

전통먹 제조가 쉽지 않았을텐데,
어떤 계기로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걸어오게 되셨나요?

스물 여덟이던 1986년 먹 공장을 운영하는 이모부의 권유로 처음 먹을 만들기 시작했지만 그때 만들던 먹은 전통먹이 아닌 카본으로 만든 현대먹이었죠. 8년 후 독립을 하면서 역사적 가치를 지닌 전통먹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국내에는 전통먹을 만드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거든요. 제대로 된 문헌도 없는 상태에서 송연 만드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일본과 중국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어렵사리 송연을 만드는 과정을 볼 수는 있었지만 한국에서 재현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죠. 2008년엔가, 경북 영양군에서 전통가마터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재현한 가마를 공방에 설치해보기도 했어요. 소나무를 태워 만든 연기 속에서 그을음을 얻어내는 작업들은 그야말로 ‘뜬구름 잡는 일’이었지요. 기술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한경대학교 화학공학과에 들어가 수많은 실험을 거쳐 유용한 데이터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송연먹을 만드는 과정이 궁금합니다.
매우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 같은데요.

우선 송진에서 그을음을 얻기 위해 송진이 달라붙어 있는 관솔 부분을 태워야 합니다. 열흘 동안 1톤 분량의 소나무를 태운 후 하루 동안 식혀서 일산화탄소를 배출시키고 공기 중의 그을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리죠. 1톤의 소나무를 태우면 4.5×17cm 크기의 먹 100여개를 만들 수 있어요. 그을음을 가마에서 긁어낸 뒤엔 아교와 10대6의 비율로 섞어 향료를 가하고 반죽한 뒤 형틀에 넣어 모양을 잡고 건조해야 완성됩니다. 숙성과정을 살펴보면 생로병사를 겪는 사람의 일생과 닮았어요. 맨 처음 먹이 완성됐을 땐 아기를 다루듯 온도와 습도를 잘 맞춰서 건조시켜야 해요. 먹은 흐린 날 수분을 머금고 맑은 날 수분을 뱉길 반복합니다. 이 과정에서 먹 입자 사이의 틈이 점점 벌어져 수용성이 좋아지죠. 건조 기간이 10년에 이르기까지는 먹색이 차츰 좋아지는 청소년기라고 볼 수 있겠네요. 먹의 수명은 50여년으로 제작된 지 50년이 지난 먹은 점점 갈라집니다. 주성분인 아교가 수분을 오랫동안 잡고 있질 못하거든요

전통먹을 만드는 과정 못지않게
국내에서 인정받기까지의 여정도 만만치 않으셨을텐데요.

처음 독립하여 사업체를 꾸릴 때만 해도 88올림픽 덕분에 전통문화 붐이 일어서 서예산업이 흥행가도를 달리던 때였죠. 하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와 2008년 세계 금융위기의 여파로 먹의 주요 소비처인 서예부문이 급격히 침체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특허전략개발원, 국립중앙과학관 등에서 주최하는 공모사업에 매진하며 돌파구를 찾았죠. 2013년부터 2019년까지 규장각 소장품 복원사업과 조선왕조실록 복제품 인쇄 사업에 참여했고, 2015년부터 5년 동안 전국 사찰 목판 인쇄 작업, 2015년부터 2017년까지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삼국유사 목판본 인쇄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현재 제가 만든 송연먹 80%가 문화재청으로 납품됩니다.

한상묵 먹장이 만든 다양한 먹 작품들 ©월간민화 한상묵 먹장이 만든 다양한 먹 작품들 ©월간민화
한상묵 먹장이 만든 다양한 먹 작품들2 ©월간민화 한상묵 먹장이 만든 다양한 먹 작품들 ©월간민화
한국의 전통먹을 알리기 위해
국내외에서 어떤 행사들을 개최하셨나요?

2007년에는 경기문화재단의 지원으로 첫 개인전을 연 이후, 2015년부터 매해 먹뿐만 아니라 먹으로 만든 각종 조형 작품 100여점을 선보이는 개인전도 꾸준히 열고 있습니다. 2018년에는 런던에 위치한 한국문화원에서 먹 만들기 체험을 개최하기도 했는데, 추가 신청자를 받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놀랍게도 60명의 참여자 모두 영국 사람이었는데, ‘그동안 한국먹은 중국이나 일본의 아류로만 생각했는데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만이 지닌 먹의 문화를 알게 되었다’고 말하더군요. 정말 보람된 시간이었습니다.

전통먹을 더욱 다양하게 활용하기 위해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 말씀해주시죠.

최근에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최하는 ‘송연먹 명품화 사업’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사우디정부 측에서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한지에 먹으로 인쇄하는 작업을 의뢰한 상태입니다. 그 외에도 막걸리, 향수, 비누, 마스카라, 심지어 타투 잉크 업체 등 품목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회사들과 전통먹을 활용한 콜라보레이션 사업을 진행 중입니다. 송연먹색은 꾸준히 사랑받고 이어져야 할 우리의 전통문화입니다. 단순한 검정색이 아닌, 한국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역사적 색감인 만큼 예술 작품을 비롯하여 우리의 삶 속에 다양하게 스며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먹을 건조할 때는 생선 굴비 엮듯이 짚으로 20개를 엮어서 자연건조한다. 먹이 제대로 건조되기까지는 그 해의 기후와 날씨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200~360일이 걸리며 10년 정도 성숙되어야 먹색이 좋아진다. ©디자인밈 먹을 건조할 때는 생선 굴비 엮듯이 짚으로 20개를 엮어서 자연건조한다. 먹이 제대로 건조되기까지는 그 해의 기후와 날씨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200~360일이 걸리며 10년 정도 성숙되어야 먹색이 좋아진다. ©디자인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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