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이야기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예쁘니? 청동거울에 비친 옛 사람들의 일상
등록일 2021-08-24 조회수6600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예쁘니? 청동거울에 비친 옛 사람들의 일상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예쁘니? 청동거울에 비친 옛 사람들의 일상

처음 한반도에 들어왔을 당시 의례용품이었던 청동 거울은 점차 사람의 얼굴을 비추어보는 화장용구로 자리매김하면서 다양한 형태와 화려한 무늬로 제작되기에 이른다. 거침에서 섬세함으로, 장식적인 요소와 함께 실용성까지 더해졌던 청동 거울을 통해 고려에서 조선을 아우르는 선조들의 삶을 짐작해 본다.

청동거울은 단군신화의 천부인 중 하나

화순 대곡리 유적 출토 유물. 오른쪽 아래 동그란 것이 청동거울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화순 대곡리 유적 출토 유물. 오른쪽 아래 동그란 것이 청동거울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세상을 비추는 거울은 선사시대에는 하늘에 제를 올릴 때 의례용품으로 사용되거나 권력자의 무덤에 부장품으로 함께 넣어두는 존엄한 물건이었다. 빛을 반사해 밝게 비추는 거울에 신비로운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천부삼인(天符三印) 중에 거울이 포함된 것이 그 대표적이 예로 볼 수 있다. 천부삼인 혹은 천부인이라 불리는 이 신표를 환인으로부터 받은 환웅은 바람과 비, 구름을 다스리는 신과 함께 내려와 지상을 다스리기 시작했다는 설화는 익히 알려진 이야기다.

1971년 전남 화순 대곡리에서 우연히 엿장수의 손에 들어간 기원전 3~4세기 청동기 유물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출토된 유물 중에는 청동검, 청동방울을 비롯해 청동거울이 포함되어 있는데, 당시 무당들이 천제를 지내거나 마을 굿을 할 때 사용하던 무구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하늘의 신을 대리하는 제사장이 국가를 다스리는 선사시대 제정일치 사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지배층의 권력을 상징했던 부장품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청동거울 ⓒ문화재청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청동거울 ⓒ문화재청

권력을 상징하는 거울의 역할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까지 이어졌다. 특히 지배세력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한 도구의 역할을 했던 거울은 권력자에게 하늘의 권능이 허락되었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물건으로 인식되곤 했었다. 백제의 무령왕릉이나 경주 황남대총 같은 잘 알려진 고분은 물론이거니와 경북 경산 일대를 지배했던 고대 소국 압독국의 무덤과 전남 남원의 두락리 및 유곡리의 가야 고분군 등 고대 한반도의 지배층 무덤에서는 마치 짜 맞춘 듯 청동거울이 발견되고는 했다.

그 중에서도 백제의 보물창고로 불리고 있는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청동거울은 거울 뒷면에 신수(신령스러운 짐승)와 사냥하는 신선의 모습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손잡이 주변에는 십이간지를 뜻하는 문자를 새겨 넣었다. 전문가들은 비슷한 모양의 거울이 일본의 고분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청동거울이 국가 간 교류에도 이용되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메이드 인 코리아의 원조 ‘고려 청동거울’

고려국조(高麗國造)라는 글자가 새겨진 고려동경 ⓒ국립중앙박물관 고려국조(高麗國造)라는 글자가 새겨진 고려동경 ⓒ국립중앙박물관

인간과 하늘을 잇는 매개체로 그리고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구로 우리 곁에 머물렀던 청동거울은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사람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도구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거울은 전국적으로 무려 2천여 점에 달할 정도로 많은 유물이 전해지고 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의 청동거울이 100여 점에 불과하다는 점과 대비된다.

이처럼 고려시대 청동거울의 양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 데는 그 이전 시대에 비해 거울이 대중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얼굴을 비춰보기 위해서는 반사가 잘 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고려 사람들은 수은을 거울 표면에 발라 매끄럽게 만들었다고 한다. 거울이 널리 쓰였다는 또 하나의 근거로 다양한 형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고려 동경(銅鏡)은 동그란 형태를 비롯해 꽃잎 모양, 종 모양 등 과거에 비해 그 형태가 다채로워졌으며, 거울에 새겨진 무늬 역시 학, 앵무, 넝쿨, 구름 등으로 차별화를 이루고 있다. 청동거울이 상품의 가치도 지니게 되었던 것. 당시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청동거울도 많았지만 고려에서 만든 동경이 중국으로 수출되기도 했다. 지금의 ‘메이드 인 코리아’의 원조라고 보아도 좋을 ‘고려국조(高麗國造)’라는 글씨가 새겨진 청동거울도 발견되었기 때문. <고려사>에 구리 5만근을 중국 후주(後周)에 수출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조선후기인 18세기 유리로 된 거울이 수입되기 전까지 청동거울은 옛사람들의 삶을 비추는 귀중한 존재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조선후기인 18세기 유리로 된 거울이 수입되기 전까지 청동거울은 옛사람들의 삶을 비추는 귀중한 존재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청동거울은 조선시대인 17세기까지 사용된다. 18세기 유리 거울이 중국과 일본을 통해 수입되면서 보편화되기 전까지, 청동거울은 여전히 이 땅의 옛사람들의 용모를 비추어 보여주는 귀중한 생활용품이었다. 목가구에 거울을 부착한 경대가 등장하면서 청동거울은 점차 자취를 감추었고, 조선후기의 풍속화에는 경대를 보며 상투를 트는 남자들의 모습이 등장하기도 한다. 청동거울에 비해 훨씬 또렷하게 사물을 보여주는 유리 거울의 인기는 실로 대단해서 뇌물로 거울을 주는 일도 빈번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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