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이야기

조선 최후의 보루 천혜의 요새 강화도
등록일 2021-05-17 조회수3453
조선 최후의 보루 천혜의 요새 강화도

조선 최후의 보루 천혜의 요새 강화도

강화도에는 멀리 선사시대의 유적인 고인돌에서 근대의 개항기까지 한반도의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수많은 유적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유적은 강화도 해안선을 따라 늘어서 있는 보와 진 같은 국방유적을 꼽을 수 있다. 바람 앞에 등불 같았던 조선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했던 천혜의 요새 강화도를 찾아가 보았다.

위기와 시련 상징하는 역사의 무대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덕진진에 세워진 경고비(복제품). 비석에는 ‘바다의 관문을 지키고 있으므로, 외국 선박은 통과할 수 없다(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는 뜻의 한자가 새겨져 있다. ⓒ강화전쟁박물관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덕진진에 세워진 경고비(복제품). 비석에는 ‘바다의 관문을 지키고 있으므로, 외국 선박은 통과할 수 없다(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는 뜻의 한자가 새겨져 있다. ⓒ강화전쟁박물관

고대로부터 국토를 방위하는 전진기지의 역할을 했던 섬, 강화도는 섬 전체가 그대로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보아야 할 장소다. 고인돌과 마니산 참성단으로 대표되는 선사시대의 유적에서 고려 대몽항쟁기의 유적, 그리고 조선후기 개항을 전후한 시기 외세의 침략에 맞선 국방유적 등 섬의 어느 곳에서나 옛 시대의 흔적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강화도가 서해를 통해 한양으로 들어오는 관문이라는 지정학적 요인들에서 비롯됐다.

강화도를 대표하는 국방유적은 해안선을 따라 섬 전체에 위치하는 수많은 진(鎭)과 보(堡), 돈대(墩臺) 등의 군사시설을 꼽을 수 있다. 개항기와 연관된 이 유적들은 19세기 말, 우리나라가 겪었던 근대화의 시련을 상징하는 유적들이기도 하다. 19세기 중엽, 서양 세력이 이 땅을 덮쳐왔을 때, 우리나라는 그들과 교류할 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물밀 듯 밀려오는 서양 세력과의 교류가 어렵다고 판단한 조선은 나라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는 ‘쇄국청책’을 실시하게 된다. 또한 당시 이미 조선 사회에 퍼져있던 서양의 문물을 배척하기 위해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실시하고 왕권을 강화해 나라의 기강을 잡으려 했다.

서양 세력에 맞서 싸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현장

초지진은 신미양요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shutterstock 초지진은 신미양요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shutterstock

당시 나이 어린 고종임금을 대신해 국가를 통치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나라 곳곳에 척화비를 세워 외세와의 타협을 금하는 한편, 군대를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는 서양 세력들에 대해 무력으로 맞섰다. 이런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가 바로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이다. 병인양요는 천주교 탄압에 대해 항의하며 문호개방을 요구했던 프랑스 군대와의 싸움이었고, 신미양요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응징하고자 불태워버린 사건으로 인해 벌어졌던 미국 함대와의 싸움이다. 바로 이 두 번의 전투 현장이 강화도 동쪽 해변에 위치한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등이다. 물론 이들 유적은 강화산성 등과 함께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중기까지 꾸준히 세워지고 증축되어 온 전통적인 방어시설이다.

오늘날 강화도의 국방유적은 강화도의 전체 해안을 빙 둘러 곳곳에 세워져 있지만, 가장 핵심적이면서도 일반에 널리 알려진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등의 기지는 김포 덕포진 일대와 마주보고 있는 강화도 동쪽 해안인 초지대교에서 강화대교에 이르는 해안을 따라 포진하고 있다. 이들 중 규모도 크고 복원과 단장이 잘 되어 강화의 대표적인 국방유적으로 꼽을만한 곳은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 등이다.

덕진진에 위치한 남장포대에는 바다를 향해 10문의 대포가 위치하고 있다 ⓒshutterstock 덕진진에 위치한 남장포대에는 바다를 향해 10문의 대포가 위치하고 있다 ⓒshutterstock

진과 보, 돈대에 남겨진 치열한 전투의 흔적

신미양요 당시 광성보 전투에서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초상 ⓒ강화전쟁박물관 신미양요 당시 광성보 전투에서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초상 ⓒ강화전쟁박물관

가장 먼저 신미양요의 현장이었던 광성보를 찾아가 보자. 1871년 신미양요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광성보는 강화도에 상륙한 미해병대와 맞붙은 수많은 조선군이 순국한 곳이다. 광성보에는 이 전투에서 순국한 어재연 장군을 기리는 쌍충비와 병사들의 무덤 신미순의총 등 역사적 유적들이 당시 처절한 전투의 증거로 남아있다. 그날의 치열했던 싸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광성보의 해안 풍경은 아름답기 이를 데 없다. 특히 절벽을 따라 바다로 뻗어있는 용두돈대의 모습이 압권이다.

덕진진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당시의 격전지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했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덕진돈대와 남장포대가 복원되어 있다. 남장포대는 강화에 있던 8곳의 포대 중 가장 강력했던 것으로 알려진 포대이다. 염하(鹽河) 즉, 소금의 강으로 불렸던 강화해협을 향해 설치된 10문의 대포가 인상적이다.

초지진 역시 신미양요의 격전지로 당시 거의 모든 시설들이 파괴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원형의 성곽은 지난 1973년 돈대만을 복원한 것이다. 돈대 바깥에 서있는 커다란 소나무에는 신미양요 당시 포탄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그날의 처절했던 전황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광성보에 소속된 세 곳의 돈대 중 하나인 광성돈대 ⓒshutterstock 광성보에 소속된 세 곳의 돈대 중 하나인 광성돈대 ⓒshutterstock

광성보: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23-1

덕진진: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355

초지진: 인천 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58

진과 보, 돈대는 어떤 시설?

광성보 안해루 ⓒshutterstock 광성보 안해루 ⓒshutterstock

진과 보, 돈대는 방어를 위한 군사시설이다. ‘진’은 군사적인 기지, ‘보’는 해안에 세운 소규모 성곽, 돈대는 지형이 높은 곳에 세워 적을 감시하는 망루 역할을 하는 시설이다. 진이 가장 규모가 크며 보와 돈의 순서로 작은 시설이라고 보면 된다. 돈대는 별도로 세우기도 하지만, 포격을 할 수 있는 시설인 ‘포대’와 함께 진이나 보의 일부로 세우는 것이 보통이다. 예컨대 광성보에는 광성돈대, 용두돈대, 손돌목돈대 같은 돈대와 광성포대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덕진진에는 덕진포대와 남장포대가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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