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이야기

경주 동해구 유적과 석굴암의 신비 구비문학 만파식적의 흔적을 찾아서
등록일 2021-05-10 조회수2019
경주 동해구 유적과 석굴암의 신비 구비문학 만파식적의 흔적을 찾아서

경주 동해구 유적과 석굴암의 신비 구비문학 만파식적의 흔적을 찾아서

만파식적의 전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우리의 대표적인 구비문학이다. 경주를 방문하는 대부분의 관광객은 토함산 일대 유적인 석굴암과 동해안에 위치하는 신라의 동해구 유적(이견대와 대왕암)을 별개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은 이 두 곳의 유적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연관이 있음에도 말이다. 만파식적의 전설이 깃들어있는 신비의 장소, 문무대왕이 잠든 동해구 유적이 석굴암과 일직선상에 위치하는 까닭을 이야기해 본다.

경주의 바닷가에 전해 내려오는 만파식적 이야기

우리는 때때로 신라 천년고도 경주에도 바다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 유명한 신비의 피리 ‘만파식적’ 전설의 무대가 바로 경주의 동해안에 있음에도 말이다. <삼국유사> ‘만파식적조’는 신문왕이 신하들과 함께 용이 된 아버지(문무왕)를 맞이하기 위해, 지금의 봉길해변 옆에 위치한 이견대에 나왔다가 검은 용으로부터 신비한 대나무를 받아 피리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주된 내용이다. 이 피리를 불면 홍수나 사나운 파도가 잦아들 뿐 아니라 신라에 침입한 적들도 물러갔다고 한다. 그야말로 온갖 걱정거리를 다 잠재우는 피리라 하니 ‘만파식적’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사학자들은 이러한 기록을 통해, 이견대가 문무왕의 신골을 대왕암에 안치하고 나서 대왕암이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바다 기슭에 건립한 일종의 망배단인 것으로 보고 있다.

만파식적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이견대 건물은 지난 1970년, 동해구 일대의 발굴조사 당시 건물의 흔적을 찾아 정자 형태의 건물로 복원한 것이다. 이견대에 올라서면 봉길해변 앞바다의 대왕암과 함께 파도가 밀려오는 장쾌한 동해안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검은 용으로부터 신비한 대나무를 받아 피리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 이견대1 ⓒ디자인밈
검은 용으로부터 신비한 대나무를 받아 피리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 이견대2 ⓒ디자인밈 검은 용으로부터 신비한 대나무를 받아 피리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 이견대 ⓒ디자인밈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문무대왕의 염원

한편 이 바다가 아련히 내려다보이는 양북면 용당리의 산자락에는 죽어서도 왜구를 진멸하고자 했던 문무대왕의 염원을 담아 건립된 원찰인 감은사의 터가 남아 있다. 현재 이 절은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3층 탑 2기만 남고 나머지 전각은 모두 소실된 채 절터만 남아있는 상태다. 주춧돌로 유추해 볼 때 감은사는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두개의 탑과 법당, 강당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이른바 ‘2탑 1금당’식 가람배치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이 양식은 법당 앞에 하나의 탑을 두는 ‘일탑 일금당식 가람배치’ 양식의 뒤를 이어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가람배치 양식으로 자리 잡게 되는 새로운 양식이었다.

그런데 감은사에는 독특한 시설이 마련됐던 것으로 보인다. 법당 밑으로 바닷물이 드나들도록 구멍을 내서 용이 된 문무대왕이 자유롭게 노닐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 남아있는 독특한 형식의 유구들에서도 일부 확인이 되고 있다. 절의 입구였을 남문 앞쪽으로는 배를 대는 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흔적이 남아있다. 절 앞쪽에 있는 사각형의 연못지가 그 흔적이다. 아마도 감은사가 처음 창건됐을 당시에는 동해의 물이 절집 바로 앞까지 들어찼을 것으로 여겨지는 대목이다.

용이 된 문무대왕이 찾아와 노닐 수 있도록 설계했다는 감은사지 ⓒ디자인밈 용이 된 문무대왕이 찾아와 노닐 수 있도록 설계했다는 감은사지 ⓒ디자인밈

석굴암에서 대왕암으로 이어지는 호국의 전설

만파식적의 전설을 따라 가는 여정은 감은사를 거쳐 토함산의 석굴암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알려진 대로 석굴암은 자연석굴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든 석굴이다. 그런데 석굴암에 모셔진 본존불상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이 감은사와 이견대, 대왕암이 자리 잡고 있는 동해라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석굴암이 향하고 있는 시선을 따라가면 감은사 터를 지나 마침내 문무왕의 해중릉인 대왕암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 방향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통일군주 문무왕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대왕암 앞에 있는 감은사도 그런 의도에서 지은 절이다. 그리고 대왕암이 잘 보이는 곳에 세워진 정자 이견대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석굴암과 불국사, 감은사와 이견대, 그리고 대왕암은 삼국통일에 대한 신라인의 열망과 환희를 담고 있는 유적인 것이다.

석굴암 본존불상은 대왕암과 이견대, 감은사가 위치하는 동해를 바라보고 있다 ⓒ경주시청 석굴암 본존불상은 대왕암과 이견대, 감은사가 위치하는 동해를 바라보고 있다 ⓒ경주시청

동해구 유적, 잊히지 않는 역사의 바다

이처럼 대왕암-이견대-감은사지로 이어지는 동해구의 유적은 통일에 대한 문무왕의 염원이 서린 유적이자 찬란한 신라 불교문화의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유적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를테면 삼국통일의 과업을 이루고 나서도 계속해서 남의 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는 강력한 나라로 남기를 염원했던 문무왕의 위대한 의지와 종교의 힘까지 빌어 그 뜻을 기리고자 했던 신라 왕실의 정성이야말로 천년을 이어온 신라 사직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제 침략기의 암담한 시절에 우리 문화의 연구에 일생을 바쳤던 선각자 우현 고유섭이 ‘경주에 가면 우선 문무왕의 유적을 찾으라’고 간곡히 말했던 것 또한 결코 사사로운 권유가 아니다. 대왕암이 바라보이는 바다, 그가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고 술회한 그 넓은 바닷가에 서면 그런 느낌이 더하다.

이견대 옆에 세워진 동해구유적의 표지석1 ⓒ디자인밈
이견대 옆에 세워진 동해구유적의 표지석2 ⓒ디자인밈 이견대 옆에 세워진 동해구유적의 표지석 ⓒ디자인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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