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표준영정

조심태 (趙心泰)
1740년(영조 16)∼1799년(정조 23),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집중(執中), 시호는 무의(武毅)이다. 집안은 증조인 유(猷)가 황해 병마절도사를 지냈고, 부친인 경(儆)이 무신년(戊申年) 난 때 공로를 세워 삼도통제사까지 지낸 무반 벌열가문이다.

 1768년(영조 44)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지방관직을 거쳤고 정조 연간에 홍충도 병마절도사, 훈련대장, 어영대장, 장용영대장 등 주요 군부 요직을 역임하였다. 조심태는 정조의 화성 축성 사업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었다. 1789년(정조 13) 수원부사에 임명되어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인 현륭원(顯隆園) 조성과 왕실 원찰(願刹)인 용주사(龍珠寺) 공역을 총괄하였다. 이 공로로 1792년(정조 16) 좌승지에 올라 최측근으로 국왕을 보필하였고, 이후 감동당상(監董堂上), 화성부유수(華城府留守)에 제수되어 1794년(정조 18)부터 34개월간 진행된 화성성역(華城城役)의 실무를 총괄하였다. 일찍부터 유형원(柳馨遠)은 수원지역을 한양 방어상의 군사 요충지로 꼽아 축성을 거론한 바 있는데, 실제로 정조는 화성(華城)을 축성하였다. 화성은 선침(仙寢) 현륭원과 행궁(行宮)을 호위하고, 아울러 자급자족이 가능한 대도회 건설을 목표로 구상된 것이다. 그는 군사전문가로서 성곽 설계에 직접 참여하였고, 장용외영(壯勇外營)의 설치로 군제개혁에 관한 절목(節目) 등을 마련하여 장용영체제를 강화하였다. 또한 자급자족이 가능하도록 시전(市廛) 상인 유치를 통한 상공업 발전을 제안하였으며, 국영농장인 대유둔(大有屯)과 저수시설인 만석거(萬石渠) 등을 건설하여 농업 진흥을 유도하였다.


 이처럼 그는 두 차례에 걸쳐 전후 5년간 수원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화성 성역을 주도하고 수원의 도시 발전을 이끌었다. 진남루(鎭南樓), 영화정(迎華亭) 편액(扁額)을 직접 쓸 만큼 서예에도 능했다고 하며, 정조(正祖)는 그를 진평(陳平: 한고조(漢高祖)의 충신)과 같은 존재로 극찬한 바 있다.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남긴 상소에는 화성부(華城府)와 11차례 원행(園幸) 당시 있었던 일들을 소회하며 전력을 다하였음을 서술하였다. 지병으로 타계하였고,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文獻] 正祖實錄, 承政院日記, 華城城役儀軌, 耳溪集

[영정개요]
-표준영정 지정년도 : 2011
-제작 작가 : 이길범
-영정크기 : 가로87㎝× 세로152㎝
-소장지 및 소장인 : 수원화성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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