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표준영정

논개 (論介)
1574(선조 7)~1593(선조 26), 국난극복의 의열여인

 논개의 생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광해군 13년(1621년)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 “논개는 진주의 관기(官妓)였으며 계사년에 왜적에게 진주성이 함락되자 논개는 촉석루 아래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순국했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인조 3년(1625년) 이후 진주의 선비 정대륭은 그가 순국한 바위에「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겼으며, 경종 2년(1722년) 진주에서는 명암 정식(鄭?)이 지은 비문으로 「의암사적비(義巖事蹟碑)」를 세웠다. 이후 정식은 당시 경상우병사 최진한에게 논개의 포상문제를 조정에 주청하게 하였으며, 이 결과 경종은 예조로 하여금 면밀히 검토하여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관기 논개를 의기(義妓) 논개로 호칭하게 하였다.

 
 영조 16년(1740년) 경상우병사 남덕하는 왕의 윤허를 받아 진주에 「의기사(義妓祠)」를 창건하고 「의기논개지위(義妓論介之位)」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의암사적비」에는 비각을 건립하여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의 현판을 게시하였다. 정조 3년(1779년) 경상우병사 홍화보는 「의기사」를 보수하였고, 순조 23년(1799년) 진주목사 홍백순은 재건하였으며 고종 5년(1868년) 진주목사 정현석은 이를 보수하고 「의암별제(義巖別祭)」를 지내도록 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의기사에서는 매년 음력 6월 그믐 논개 제향을 봉행하고 있으며, 전라북도 장수군에서는 1956년 의암사(義巖祠)를 창건, 함태영 부통령의 친필 현판을 게시했다. 또한 그녀의 출생지라고 알려진 장계면 주촌리에 생가를 복원해 장수 군민들과 신안 주씨 종친들이 매년 음력 9월 3일 제례를 봉행하고 있다.


參考文獻 :於于野談, 太常諡狀錄, 備邊司伸報, 晋陽誌,長水縣邑誌,長水郡誌

[영정개요]
-표준영정 지정년도 : 2008
-제작 작가 : 윤여환
-영정크기 : 가로110㎝×세로180㎝
-소장지 및 소장인 : 국립진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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