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표준영정

신채호 (申采浩)
1880(고종 17)~1936, 독립운동가, 사학자, 언론인

 호는 단재(丹齋), 본관은 고령(高靈). 충북 청주(淸州) 출신. 어려서부터 독서에 열중, 제가(諸家)의 책을 박람(博覽)하였으며, 20세에 성균관 박사(博士)를 지냈다.

 황성신문(皇城新聞),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등에 논설을 쓰고, 독사신론(讀史新論)을 발표하는 한편, 영웅전을 써서 민족의식의 앙양과 독립정신의 고취에 힘썼으며, 전제주의 국가는 세계대세의 흐름을 거슬리는 나라로서 반드시 망한다고 강조하고, 우리나라는 국민의 국가로 나가야 한다고 일찍이 주장하였다. 1907년 신민회(新民會)에 가입,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참가하였다.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해조신문(海潮新聞)을 발간하였으며, 다시 상해(上海)와 북경(北京)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만주의 고구려 유지(遺址)를 답사하면서 국사 연구와 저술에 전심하였다.


 그는 단군을 우리나라를 개창하신 시조로 인식하였으며, 단군이 만주를 다스렸다고 밝히면서, 만주에 거주했던 고구려와 부여가, 고조선의 통치지역을 계승한 정통국가임을 강조하였다.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상해에 가서 의정원(議政院) 전원위원장(全院委員長)이 되었다가, 1921년 임시정부의 분열상을 보고 사직, 북경에 가서 순 한문지 천고(天鼓)를 발행하고 중화일보(中華日報)에 논설을 썼다. 1929년 대련(大連)에서 일본관헌에게 체포되어, 10년형 선고를 받고 복역 중 여순(旅順)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순수한 민족주의적 사관으로, 당시 식민주의적인 일제의 학설을 배격하였으며, 항일 독립운동의 이념적인 지도자였고, 우리나라 언론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을 추진함에 있어서, 온건한 타협적인 방법으로는 제국주의 일본을 축출할 수 없음을 간파하여, 실질적인 비타협적이고 강인한 무력에 의한 것만이, 절대독립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裝)이 수여되었다.


[著書] 朝鮮上古史, 朝辯史硏究草, 乙支文德傳 等 [文獻] 騎鑛隨筆, 韓國獨立運動之血史, 申以燮 : 申采浩 等

 [영정개요]
- 표준영정 지정년도 : 1986
- 제작작가 : 정광일
- 영정크기 : 세로109cm X 가로65cm
- 소 장 지 : 청원 단재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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