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학문과 무예를 열심히 닦아 장차 나라를 이끌 큰 인물이 될 것이라며 주위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법흥왕의 근신(近臣)으로서 벼슬이 내사사인(內史舍人)에 올랐다. 그가 장성하자 왕은 그를 공주와 결혼시켜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그가 다른 여인을 사랑하고 있다고 하자 왕의 노여움을 사서 고구려로 쫓겨났다.
고
자는 백원(伯源), 호는 고산자(古山子), 본관은 청도(淸道). 황해도 출신, 어려서 서울로 이주, 미천한 가문의 출신이었으나 학문을 열심히 닦았으며, 정밀한 지도의 작성에 뜻을 품었다. 그는 지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지(地志)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지지란 역대 제도와 문물, 풍습 등과 지역과의 관계를 적은 것을 말한다. 그래서 역사에
호는 중봉(重峯), 본관은 백천(白川)이다. 1567년(명증 22) 병과(丙科)로 급제, 1572년(선조 5)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로, 왕이 절에 향(香)을 하사하는 것을 반대하다 삭직(削職), 곧 저작(著作)에 등용되고, 그 후 통진 현감(通津縣監)이 되어 죄인을 엄중히 다스려 남형(濫刑)한다는 탄핵을 받고 부평(富平)에 유배되었다. 1581
869년(경문왕 9) 당나라에 유학 하였으며, 874년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선주표수현위(宣州漂水縣尉)가 되었으고,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承務朗侍御史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또한 국외에서 문명(文名)을 떨치며 성공한 최초의 유학생이었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 제도행영병마도통
중원소경(中原小京 :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의 사량(沙梁) 출신. 육두품(六頭品)으로 보이는 내마(奈麻) 석체(昔諦)의 아들이다. 어머니가 그를 임신했을 때 꿈에서 머리에 뿔이 돋친 사람을 보았는데 그가 태어나자 머리 뒤에 높은 뼈가 있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아버지가 그를 데리고 현자(賢者)에게 가 물어보니 뛰어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
호는 포은(圃隱), 본관 연일(延日). 영친(永川) 출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藝文檢閱)을 역임한 후 1363년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여진족(女眞族) 토벌에 참가하였다. 1371년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올랐으며, 이듬해에 명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
호는 단원(檀園) 본관은 김해(金海),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솜씨가 뛰어났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제대로 그림공부를 하지 못했다. 호조참판(戶曺參判) 강세황(姜世晃) 앞에서 그림을 그려, 그 실력을 인정받아 그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圖畵署畵員)이 되었다.
1771년(영조 47) 왕세손(뒷날 정조)의 얼굴을 그렸고
별성명은 궁복(弓福), 궁파(弓巴). 일찍이 당나라 서주(徐州)에 건너가 무령군 소장(武寧軍小將)에 올랐으나, 신라에서 잡혀와 노비(奴婢)가 된 사람들의 불쌍한 정경을 보고 분개, 벼슬을 사직하고 귀국하여 해적들의 인신매매 행위를 근절시키기 위해 왕의 허락을 얻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해로(海路)의 요충지인 청해(淸海: 莞島)에 진(鎭)을 설
재위 1849~1863, 초명은 원범(元範), 자는 도승(道升), 호는 대용재(大勇齋), 정조의 아우 은언군(恩彦君)의 손자로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셋째 아들이다.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 헌종과 원범 두 사람뿐이었다. 1849년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 : 순조의 비, 金祖淳의 딸)의 명으로 정조의 손자 순조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