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표준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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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계 귀화인과 기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아산(牙山)의 명신으로만 기재되어 있다. 동래현의 관노로 있을 때 그의 재주가 세종에게 인정되어 중국에 파견, 천문기기연구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귀국하자 면천되고 1423년(세종 5) 상의원별좌(尙衣院別坐)에 임명되어 궁중기술자로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등용된 그 다음해인 1424년

 호는 성호(星湖) 본관은 여주, 대사헌 하진(夏鎭)의 아들이다. 1705(숙종 31) 증광문과(增廣文科)를 보았으나 낙방하고 이듬해 형 잠(潛)이 당쟁으로 희생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안산(安山) 첨성촌에 머물러 일생을 학문에 전심하여 유형원(柳馨遠)의 학풍을 계승하여 실학자의 중조(中祖)가 되었다. 1727년(영조 3) 학행으로 추천되어 선공감가감

 재위 1724~1776년. 숙종의 4남, 1721년(경종 1) 경종에게 후사(後嗣)가 없어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이듬해 김일경(金一鏡) 등의 사주로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1724년 즉위, 김일경, 목호룡(睦虎龍) 등 신임사화를 일으킨 소론을 숙청, 한때 노론정권을 수립했으나 붕당(朋黨)의 폐습을 통감하여 차츰 소론을 등용하고, 1727년

 재위 1777~1800년.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아들, 어머니는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 1759년(영조 35) 세손(世孫)에 책봉, 아버지가 원통하게 죽은 뒤 후사(後嗣)가 되었고, 1775년 늙은 영조를 대신하여 국정(國政)을 다스렸으며, 이듬해 영조가 죽자 즉위하였다.  즉위 이듬해 왕을 시해(弑害)하고 은전군(恩全君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본관은 황려(黃驪 :驪興). 1189년(명종19) 사마시(司馬試), 이듬해 문과(文科)에 급제, 1202년 병마녹사검수제(兵馬錄事兼修製)를 거쳐 권보직한림(權補直輪林)으로 발탁되었다. 1219년(고종 6) 좌사간(左司諫)으로서 지방관의 죄를 묵인한 것으로 계양도호부부사(桂陽都護府副使)에 좌천당했다. 1220년 예부 낭중

 본관은 양천(陽川), 호는 구암(龜巖)이다. 1575년 24세로 의과에 급제하여 의관이 되어, 내의원(內醫院)에 봉적하면서 내의, 태의, 어의로 명성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술하여 우리나라 의학의 실력을 청나라 및 일본에까지 과시하였다.  1575년 2월에 어의(御醫)로서 명(明)나라의 안광익(安光翼)

 본관 순천, 자 인수, 호 취금헌(醉琴軒), 시호 충정(忠正), 형조판서 중림(中林)의 아들이다.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집현전(集賢殿) 학사로서 여러 가지 편찬사업에 종사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38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1447년

 일명 태종(苔宗). 성은 김씨. 내물왕의 4대손으로, 지증왕 이래 법흥왕·진흥왕대까지 활약한 신라의 대표적인 장군이자 정치가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열전에 따르면, 이사부는 505년(지증왕 6) 신라 최초로 설치된 실직주(悉直州 : 지금의 삼척)의 군주(軍主)에 임명되었고, 512년(지증왕 13)에는 하슬

 제주출신 여성. 조선후기 거상(巨商)으로 제주도에 큰 기근(飢饉)이 발생하자 자신의 전 재산을 내놓아 육지에서 사온 진휼미로 빈사상태의 제주도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시대를 뛰어 넘은 최고경영자(CEO)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1739년(영조 15)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집중(執中), 시호는 무의(武毅)이다. 집안은 증조인 유(猷)가 황해 병마절도사를 지냈고, 부친인 경(儆)이 무신년(戊申年) 난 때 공로를 세워 삼도통제사까지 지낸 무반 벌열가문이다.  1768년(영조 44)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지방관직을 거쳤고 정조 연간에 홍충도 병마절도사, 훈련대장, 어영대장, 장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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