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별 문화인물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1864∼1953 / 한말의 독립운동가·서예가·언론인
  • 문화관광부는 근대를 대표하는 서예가·전각가(篆刻家)이자 탁월한 감식안(鑑識眼)을 지닌 서화사(書畵史) 연구자이기도 한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 1864∼1953)선생을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생애 및 업적
  •  근대를 대표하는 서예가·전각가(篆刻家)이자 탁월한 감식안(鑑識眼)을 지닌 서화사(書畵史) 연구자이기도 한 위창 오세창은 조선말기의 역관(譯官)으로 개화사상의 선각자요 서화가로 유명한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 1831∼79)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친으로부터 개화사상의 일단을 이어받아 언론인으로 활동했고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3·1 만세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다 투옥되기도 했다. 1921년 11월 2년 8개월 만에 가출옥된 뒤 일제강점기 동안 민족 서화계의 정신적 지도자로 활약하면서 서예와 전각 분야에서 걸출한 예술성을 발휘했다. 광복 직후에는 민족대표의 상징적 인물로서 추앙받으며 건국준비 초기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여러 정당의 고문에 추대되었으며, 무수한 환영대회·국민대회·시민대회에 주요인사로 참석했다.


     이밖에 그는 부친과 자신이 수집했던 풍부한 서적과 고서화·금석탁본 등을 토대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편찬하는 등 우리나라 서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남기기도 했다. 언론·사회 활동 오세창은 부친 오경석과 함께 "개화"와 "독립"이라는 근대사의 민족적 대명제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우선 그는 우리나라 언론 1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한성주보(漢城周報)> 기자를 지냈고, <만세보(萬歲報)>와 <대한민보(大韓民報)> 사장을 지내면서 개화운동과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했는가 하면, 광복 후 서울신문 초대사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또 그는 1902년 개화당(開化黨) 역모사건으로 인해 일본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천도교(天道敎) 교주였던 손병희(孫秉熙)를 만나 그를 통해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귀국 후에는 손병희·권동진(權東鎭)·최린(崔麟) 등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향후 독립운동의 전환점이 된 3·1 만세운동에 앞섰다.


     이밖에 그는 1918년 서화협회(書畵協會)를 창설한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뒤에는 고문으로 있으면서 민족서화계의 대표인사로 활동했다. 이러한 오세창의 왕성한 사회활동은 개화 선각자였던 부친과 어렸을 때 가숙(家塾)의 스승이던 유홍기(劉鴻基, 일명 劉大致)의 개화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의 청·장년기를 통해 일관되게 전개되었다. 전각 (篆刻) 오세창은 10대 말부터 부친으로부터 전각을 배운 이래 자신을 "조충 (雕蟲:새김벌레)"이라 불렀을 정도로 전각에 몰두했다. 그의 전각은 크기·형태·재료 등에서 다양할 뿐만 아니라, 각풍(刻風)에 있어서도 종정금문(鐘鼎金文)·상형고문(象形古文), 진(秦)·한대(漢代) 고인(古印)의 각풍 및 청대(淸代) 명가들의 각풍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수용하였다.


     또 인문(印文:인장에 새겨진 글)에 있어서도 예를 들어 위창(葦滄)이란 호를 "韋倉" 등의 동음이자(同音異字)로 새기거나 여러 가지 별호(別號)를 지어 작품에 응용하여 전각과 서예를 겸비한 면모를 잘 보여주었다. 더욱이 그의 서예가 실제 전각의 수련을 바탕으로 진보될 수 있었다는 점과 그저 신표(信標) 정도로 이해되던 전각에 본격적인 예술성을 더해갔다는 점에서 근대 전각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서예 (書藝) 오세창은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에서 예술적 성과를 이루었고, 옛 명적을 보고 베껴 쓰는 임서(臨書)로부터 엄정·단아한 서풍의 자기세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풍을 보였다. 전서(篆書)는 상(商)·주대(周代) 종정문(鐘鼎文)으로부터 진(秦)·한대(漢代) 이후의 와전문(瓦塼文)·각석(刻石)·비갈명(碑碣銘)은 물론이요 청대(淸代)의 여러 전서풍에 이르기까지 전 영역을 섭렵하였다. 또 그것들이 지닌 금석학적(金石學的) 의미를 탐구하는 등 이론과 실제 양면에서 근실한 연찬을 수행했다. 그 중에서도 상형고문(象形古文)이나 종정금문(鐘鼎金文)을 응용한 것과 엄정한 소전(小篆)을 특유의 필법으로 소화해낸 것이 백미이다. 예서(隸書)는 한대(漢代) 예서를 근간으로 청대(淸代) 예서풍도 두루 수용했는데, 중년에는 정갈한 필치였다가 노년에는 전서의 필의(筆意)를 가미한 졸박한 서풍을 이루었다. 이러한 그의 서예는 부친에게서 전해 받은 수많은 금석탁본과 관련서적 등 청조문물(淸朝文物)의 영향이 크다.


     또 문자학(文字學)에 대한 통달과 전각에서의 독보적 경지는 그의 서예 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하였다. 흔히 근대의 명서가 가운데 "고전을 이끌어내는 데 위창을 따를 사람이 없다"고 하는 말은 그의 예술적 특징을 대변해주는 예이다. 금석학(金石學)·서화사(書畵史) 연구 오세창은 김정희(金正喜)·이상적(李尙迪)·오경석으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금석학의 전통을 실제의 서예작품을 통해 심화시켜 갔다. 그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금석문에 대한 엄정한 고석(考釋)을 가했는데, 여기에는 유물에 대한 역사적 안목, 철저한 실증적 태도, 사려 깊은 심미안 등 작가의 모든 역량이 배어있다.


     또 그는 옛 금석문과 서화를 심정(審定)하는 등 감식가(鑑識家)로서도 활약했는데, 그러한 자취는 곳곳의 고탁본이나 고서화에 남겨진 그의 제발(題跋)로 전한다. 탁월한 감식안을 바탕으로 그는 서화자료의 수집과 서화사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정리해낸 편저물로 우리나라 고서화를 집대성한 <근역서휘(槿域書彙)>·<근역화휘(槿域畵彙)>·<근묵(槿墨)>, 조선시대 명인들의 인영(印影:인장을 찍은 것)을 모은 <근역인수(槿域印藪)>, 우리나라 역대 서화가에 관한 문헌사료를 모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편저물은 오늘날 한국서화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참고서로 평가되고 있어 그를 작가라기보다 서화사 연구자로 강조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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