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문화인물

이해랑 (李海浪)
1916~1989 / 연극배우, 연출가
생애 및 업적
  •  이해랑의 연극생애는 대체로 3기로 나눠진다. 즉 제1기는 니혼대학 시절의 학생예술가로부터 해방직후까지의 10년여 동안이고, 제2기는 정부수립 때부터 1970년대 초까지의 26여 년간이며, 제3기는 1970년대 중반부터 서거전 15년여 동안이라 하겠다.


     제1기는 20대 초반부터 30대 초반까지의 열정과 감수성만 갖고 연극본질을 탐구하면서 조단역(助端役)으로 무대에만 섰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극연(劇硏), 고협(高協), 현대극장, 전선, 등의 극단에서 아무 작품이나 주어지는 역을 맡아 열심히 연기만한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이렇다 할 주목도 끌지 못했고 업적 또한 두드러진 것이 없다. 다만 해방 직후 혼란기에 민족진영 연극을 앞장서서 지킨 점이 하나의 공로가 될 것이다.


     제2기는 연극계의 소장파 리더로서 자기가 직접 극단을 조직하고 이끌면서 연기와 연출을 겸하는 50대 초반까지 인데 이 시기에 좌우익 갈등과 6.25 전쟁이 있었으므로 그가 신극사의 명맥(命脈)을 잇는 중추적 역할을 한 것이다.


     끝으로 제3기는 연극계의 지도자로서 사회적 명성과 지위를 누리는 한편 원숙한 경지에서 연출작업만 할 시기로서 그가 연극운동에서 벗어나 고도의 예술작업만 한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작품선택만 하더라도 제1기는 하기 싫건 좋건 아무 작품, 아무 역이나 주어지는 데로 무대에만 섰고 제2기는 그가 직접 극단을 조직 운영한데다가 연출과 연기를 겸했기 때문에 예술성과 대중성을 함께 고려해서 취택한 것이 특징이다. 그가 별로 좋아하지 않은 셰익스피어를 여러 번 공연한 것이라든가 오닐과 체흡 작품을 연출, 출연한 것에서도 그것은잘 나타난다. 그리고 제3기 때는 자유스런 위치에서 국립극장에 조언하고 또 작품도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를 여럿 선택해서 연출한 작이다. 이때에 뛰어난 작품 몇 개를 연출하여 현대연극사에 이정표를 남기기도 한 것이다.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이 되고 1957년 중앙국립극장장, 1962년 한국연극연구소(드라마센터) 극장장, 1966∼1988년 이해랑이동극장 대표, 1967∼1973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회장 등의 자리를 지키면서 제 8, 9대 국회의원이 되어 정치활동도 했다. 1983년 국립극장 종신단원, 1984∼1989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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