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문화인물

조헌(重峯 趙憲)
1544~1592 / 조선 왕조 중기의 유학자
생애 및 업적
  •  포은·정암·퇴계·율곡 선생으로 이어지는 한국 유학의 도통(道統)을 계승하고, 도학자(道學者)로서의 삶에 충실하였으며, 임진왜란에 창의(倡義), 순국하기 까지 일생을 한 결같이 배운 바를 실천궁행하여, 천하 독서인의 모범이 되고 겨레의 사표가 되었음.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열(文烈)이며, 문묘(文廟)와 김포의 우저서원(牛渚書院)·금산 칠백의총의 종용사(從容祠) 등에 배향됨. 문집으로는《중봉집(重峯集)》이 전함.


     조 헌(1544~1592)은 조선 왕조 중기의 文臣으로 유학자, 經世思想家, 의병장. 字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본관은 배천(白川)으로 고려 말 홍건적을 격파하고 전사한 천주(天柱)의 후손. 경기도 김포 감정리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으며, 어려서부터 평생 부모에 효도하고 독서를 열심히 하였다. 김황(金滉)에게 수학하고, 성균관에 유학하였으며, 24세 때 과거에 급제한 이래 정주·파주·홍주목의 교수와 교서관의 저작박사를 거쳐 예조좌랑, 통진현감, 공조좌랑, 전라도사, 종묘서령, 보은현감, 공주목교수 겸 제독관(公州牧敎授兼提督官) 등을 역임하였다. 보은현감 재직 시에는 당시 충청도에서 치민제일(治民第一)로 목민관의 모범으로 평가되었다. 교서관 박사때에는 <주자대전·어류>를 교정하였고, 평소에 <주자대전>을 즐겨 읽어 배송할 정도였다. 토정 이지함·우계 성혼·율곡 이이에게 수학하였으며, 특히 율곡의 학덕을 배우고 기린다는 뜻으로 후율(後栗)이라 자호(自號)하였다. 1584년 겨울 충청도 옥천군 안읍 밤티의 궁벽한 산골로 은거하여 후율정사를 짓고, 생애의 마지막 7·8년을 이곳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강학(講學)에 정진하면서, 공·맹·정·주와 정암 조광조·퇴계 이황·율곡을 계승하고자 하여, 한국 유학사에 있어서 계왕개래(繼往開來)의 확고한 인식과 적극적인 의지를 표방하였다.


     일찍이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올린 <동환봉사>와 더불어 그의 학문과 사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상소문들이 이곳에서 구상되고 쓰여 졌다. 16세기 조선사회에 대한 현실 인식과 실천적 학문관을 토대로, 정치·교육·경제·군사에 관한 근본적인 개혁론을 제시하였던 바, 철저한 민생의 안정을 시종일관 주장하였으니, 그의 경세사상(經世思想)과 나아가 실학의 선구적 경향을 고찰할 수 있다. 여러 차례에 걸친 강직한 상소와 도끼를 들고 올린 지부상소(持斧上疏) 등으로 함경도 길주로 유배되기도 하였으며, 또한 왜적의 침입을 예견하고 대비할 방책을 거듭 상소하였다. 그의 예측대로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호남의 고경명·김천일, 영남의 곽재우·정인홍과 함께, 충청도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5월에 칭의(倡義)하여 보은군 수리치재(車嶺)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수차례 의병을 규합하여, 8월 1일에 의승장(義僧將) 영규(靈圭)와 함께 청주성을 수복함으로써 충청도 공략의 본거지를 탈환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곧이어 의주로 북상하기 전에, 관군의 시기와 방해로 흩어지고 남은 700명의 외로운 의병을 이끌고, 의승장(義僧將) 영규(靈圭)와 함께 8월 18일 왜군에게 함락당한 금산 공격을 강행하였으나, 후원군이 없는 상태에서 중과부적으로 모두 장렬히 순국하였다.


     이는 왜란이 일어난 이래 다른 군대에서는 볼 수 없었고 지나간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어 왜적들도 타격을 입고 퇴각함으로써 당시 호남 방어의 근거지였던 금산이 회복되었다. 이로써 임란 초기에 이순신의 制海 활동과 함께 결국 국가 중흥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유학을 천명하고 충절의 의리를 실천하여 한국 도학의 정통을 계승함으로써 文廟에 배향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열(文烈). 칠백의총 종용사와 우저서원, 표충사, 창주서원, 후율사 등에 배향되고, 문집으로 <중봉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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