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문화인물

서파 유희 (西陂 柳僖)
1773∼1837 / 조선 후기의 한글학자.
  • 문화관광부는 조선후기 유학자이자 음운학자이며, 독창적인 방법으로 한글을 연구하고 훈민정음의 자모를 분류·해설한 유희(柳僖 : 1773∼1837) 선생을 10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유희는 중국의 정주학(程朱學)으로 근본을 삼되 이용후생으로 의무를 삼은 실학적인 유학자요 박물학자요 문자 학자였다. 유희는 정제두(鄭齊斗)의 양명학을 연구한 이광려(李匡呂)의 문인이자 당시의 유학, 박물학, 문자학 연구에 크게 영향을 받은 실학자라 할 수 있다.
생애 및 업적
  •  유희는 1773년(영조 49년)에 현재의 용인시 모현면 매산리에서 태어났다. 자(子)는 계중(戒仲)이요, 호(號)는 남악(南岳), 서파(西陂), 방편자(方便子), 관청농부(觀靑農夫) 등이었다. 원래의 이름은 경(儆)이었는데, 뒤늦게 희(僖)로 바꾸었다. 유희는 목천 현감을 지낸 진주 유씨 한규(漢奎)와 《태교신기(胎敎新記)》를 비롯한 수많은 저서를 썼던 여류학자 전주 이씨 사주당(師朱堂)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희의 아버지는 부인 사주당 이씨를 소중히 여기고 서로 깊은 이치를 토론하고 성정(性情)을 읊으며 서로 지기(知己)로 여기면서 살았다. 이러한 부모를 둔 유희는 부모의 영향을 크게 받아 영특하고 효성스러웠으며 부지런하면서 토론을 즐겼고 일생동안 학문에 열심이었다.


     유희는 태어났을 때에 신묘한 풍채가 뛰어났는데, 돌 무렵에 천연두를 앓아 모습은 초췌 해지고 건강도 크게 해쳤으나 생각은 남달랐다. 일찌감치 한자와 한문을 깨우치고 글도 지었는데, 다섯 살 때에는 《성리대전(性理大全)》이란 어려운 성리학 책을 깨우칠 정도였다. 이어서 중국의 《사략(史略)》《통감(通鑑)》 같은 역사책과 《맹자(孟子)》 같은 경서 그리고 두보(杜甫)의 시들을 공부하고서 16세경부터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11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는 어머니의 영향을 크게 입었는데, 어머니가 과거 시험 보는 것을 극구 만류하고 적절한 곳을 골라 살면서 천진(天眞)을 지키라 하여 이러한 가르침을 따라 고향 용인에서 그리고 37세 이후의 10년간은 충북 단양에서 지내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1837년 65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농사를 지으면서 일생동안 저술에만 힘썼다.


     16세와 18세에 감시(監試)에 응하기도 했던 유희는 과거와 벼슬을 만류했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그의 둘째 누이로부터 권유를 받아 과거를 보았는데, 53세(1825년)에 소과인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였고 57세(1829년)에 황감제시(黃柑製試)에도 급제하였다. 그러나 유희는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벼슬에는 나아가지 않고 허약한 몸으로 저술에만 열중 하여 근 100권의 저서를 남기게 되었다. 이 저서들 중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유희의 저서는 80종 가까이에 이른다. 이들 저서들을 보면 많은 것들이 《논어집주보설(論語集註補說)》《맹자고류정(孟子 類訂)》 등의 유교 경전들을 연구한 것들이다. 특히 《춘추대지(春秋大旨)》를 비롯한 '춘추'에 관한 책이 20여권에 이른다. 다음에 《물명고(物名考)》《만물류(萬物類)》《시물명고(詩物名考)》 등의 박물학 저서들이 있고, 그의 52세(1824년)에 완성한 저 유명한 《언문지(諺文志)》를 비롯한 《서자류(書字類)》《육서류설(六書類說)》 등의 문자론 저서들이 있다. 또한 《방편자구록(方便子句錄)》《방편자문록(方便子文錄)》 등의 시문집 이외에 역사학, 음악, 수학, 농학, 기상학, 의약학 등에 관한 저서들도 있다.


     요컨대 유희는 전체적으로는 이전의 잘못된 것을 고증을 통해 바로잡거나 보충하되 우리의 것도 넣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펼치고 있는데, 중국의 정주학(程朱學)으로 근본을 삼되 이용후생으로 의무를 삼아 마음으로 연구하고 마음으로 복종한 실학적인 유학자요 박물학자요 문자학자인 것이다. 유희에게 학문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태교신기》(1800년)를 지은 어머니 사주당 이씨인데, 유희가 이 책을 10개의 장구로 나누고 이에 '석·음·의(釋·音·義)' 를 달고서 언해(諺解)를 붙인 《태교신기장구대전(胎敎新記章句大全)》(1801년)을 저술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유희는 강화 출신 정동유(鄭東愈 1744-1808)의 문인이었다. 정동유는 유명한 《주영편 (晝永編)》의 저자로서, 강화 출신인 정제두(鄭齊斗)의 양명학을 연구한 이광려(李匡呂)의 문인 이다. 또 정동유는 같은 계통의 이충익(李忠翊)과는 신교(神交)로 유명하였다. 유희가 《태교 신기》의 서문을 부탁하여 써준 역시 강화 출신의 석천(石泉) 신작(申綽)과도 많은 토론을 거쳤고, 그런 중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도 만나 토론을 한 바 있다. 이로부터 보면 많은 실학자를 배출한 경기지역에서의 당시의 유학·박물학·문자학 연구에 크게 영향을 받은 같은 계통의 학문을 이룬 실학자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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