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문화인물

정월터 (Walter 鄭)
1904~1983 / 체육인
생애 및 업적
  •  월터정은 1904년 2월 15일 미국 하와이 파알라 섬의 사탕수수농장 이민노동자인 정운서, 이신실 부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체육과 음악분야에 재능이 뛰어나 학창시절엔 체조와 다이빙선수로 활약했고 19살에 하와이 YMCA 체육보조지도자로 근무했으며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밴드를 조직하이 연주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YMCA 체육보조지도자로 근무하던 그는 테네시 주 킴벌리대학에 진학하였다. 택시운전사, 떡장사. 재단사 등으로 고학을 하며 학업을 마친 월터정은 다시 하와이로 돌아와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하와이를 중심으로 활동한다.


     출생지로 돌아온 월터정은 세일즈맨으로 하와이 생활을 다시 시작하였고 세일즈맨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둔 그는 이를 바탕으로 소규모 자영업을 차리고 기업인으로 나섰고 재미한국인 인권협회를 조직하여 교류민들의 권익신장에 앞장섰고 하와이 상공회의소에 정회원으로 가입하는 등 활동영역을 넓혀 교민사회의 유력인사의 지위를 다졌다. 월터정은 미국정치에 관심을 가져 1932년엔 공화당에 가입하여 허버트 후버 대통령 재선운동을 지원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32년 미대통령선거에서는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뉴딜정책을 내걸고 공화당정부의 경제정책 실패를 질타한 끝에 압도적 대승을 거두고 백악관에 입성하였다. 대통령선거에서 패자인 후버대통령편을 들었으나 월터정은 한국인 이민 2세로는 최초로 미공화당원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월터정은 미태평양사령부 고문을 맡아 미군의 전쟁수행을 도왔다. 뉴욕을 중심으로 본토활동을 펼치던 월터정은 6.25사변이 발생하기 4개월 전인 1950년 2월 부모의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온다. 생애의 전반이 끝나고 전반과는 전혀 다른 생애의 후반이 이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영주귀환 이전인 뉴욕 시절부터 모국 체육계와 연계하여 스포츠외교에 관여한 월터정은 영주귀환과 동시에 KOC위원에 선임되어 체육계와 관계를 맺었다. 스포츠외교란 정부 간의 접촉과 협상이 아닌 순수한 민간주도의 국제교섭이며 그가 스포츠외교에 처음 관여한 건국초창기는 스포츠외교 분야가 거의 불모지나 다름이 없었으므로 월터정은 스포츠외교의 기본을 하나씩 정립하여 나가다시피 하였다. 월터정이 스포츠외교의 전면에 등장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50년대 중반이었다. 1956년 제16회 멜버른올림픽과 함께 열린 IOC총회에 참석한 월터정은 그가 노환으로 병석에 누운 1982년까지 lOC총회를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참석하여 중요한 국제스포츠 현안에 관련하여 한국의 입장을 대변하고 이를 반영하는데 적극 노력하였다.


     월터정은 IOC 이외에도 AGF(아시아경기연맹), OCA(아시아올림픽평의회) 등 스포츠관계 주요 국제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하였고 AGF가 해체될 때까지 평의원을 맡았다. 또한 서울올림픽 유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었다. 스포츠외교 활동에 기여한 공로로 그는 1970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모란장을 받았고 1976년 정부로부터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올림픽훈장을 수상했으며 대만정부로부터 금메달장을 받았다.

     그는 스포츠외교활동을 벌이면서 수집한 각종 자료와 기념품을 생전에 학교법인인 부산의 성창학원에 기증하였으며 1백 31점에 달하는 유품은 성창학원에서 운영하는 성지공고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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