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별 문화인물

잠곡 김육(潛谷 金堉)
1580∼1658 / 조선중기 문신, 대동법 시행, 동전의 통용 및 시헌력 도입.
  • 문화관광부는 조선중기 문신이며 대동법 시행, 동전의 통용 등을 통해 경세이념을 구현한 잠곡 김육(潛谷 金堉 : 1580∼1658) 선생을 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그는 서양역법인 시헌력(時憲曆)의 도입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수레의 보급을 추진하고 청나라로부터 열심히 배우려는 자세를 실천하여 실학의 학풍 조성에 노력하였다. 그는 이러한 경세이념을 「유원총보」「해동명신록」「잠곡유고」 등의 저술을 통하여 발전시켰다.
생애 및 업적
  •  김육(金堉)은 인조·효종 때의 문신으로서 본관이 청풍(淸風)이며 호를 잠곡(潛谷)이라 한다. 그는 1580년 7월 14일 서울 마포리(현 마포구 마포동·용강동·토정동)의 외가에서 출생하였고 회현방(현 중구 회현동)의 자택에서 1658년 9월 4일에 79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김육은 어려서부터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할 경세(經世)의 뜻을 가졌다. 광해군 때에 자신의 포부를 펼칠 수 없게 되자, 경기도 가평군 잠곡에 내려가 10년간 농사를 지었다. 이때 농촌의 실정을 소상히 파악하게 되었다. 그는 많은 역경을 겪으면서 그것에 좌절당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갈고 닦아 의지력을 기르고 경세의 사상과 신념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김육은 인조반정 이후 관직에 진출하여, 백성과 나라를 위한 경세 이념을 다양한 정책으로 구현하여 추진하였다. 그는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동전이 전국적으로 보급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당시 대동법과 동전 유통을 강력히 추진하는 그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었다. 대동법은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균등하게 하면서 정부의 세입을 줄이지 않는 점에서, 조세제도의 합리적 개혁 이었다. 그로 인하여 백성의 경제력이 향상하였다. 나아가 대동미·포의 거래를 통하여 시장이 성장 하였다. 동전의 통용은 화폐경제를 발전시키고 시장의 성장을 촉진하였다. 그는 서양역법인 시헌력 (時憲曆)의 도입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김육이 죽자, 대동법으로 혜택을 입은 충청도 주민들이 슬퍼하여 그의 공덕을 기리는 대동선혜비 (大同宣惠碑)를 세웠다. 그것은 현재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에 있다. 효종도 "대동법을 추진하던 지난날에 김 영부사(領府事)가 홀로 담당하여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음으로써(堅確不撓)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매번 생각할 때마다 잊지 못하여 김육처럼 확고한 인물을 얻기를 바라나,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하였다.


     김육은 백성과 나라에 실질적인 혜택을 주는 경세 이념을 중시하여, 경세의 시무책에 유용한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였다. 그는 조세제도의 합리적 개선을 추구하고, 상업을 촉진할 동전·수레의 보급을 추진하고, 청나라로부터 열심히 배우려는 자세를 실천하였다. 그런 점에서 김육은 실학의 학풍을 조성 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는 유원총보, 해동명신록, 잠곡유고 등의 저술을 통하여 경세론을 발전시켰다. 김육이 경세의 시무책을 중시하고 경세의 실무를 소상히 파악하여 꾸준히 추진하는 자세는 주변의 관료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경세 관료를 육성하고 자신의 과업을 맡기기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 김육은 관료제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김육이 죽은 후에 성리학을 절대시하고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함에 따라, 경세의 시무책을 중시하는 학풍이나 경세의 실무까지 소상히 파악하여 꾸준히 추진하는 관료의 전통은 발전하지 않았다. 이러한 추세는 이후의 경제발전에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김육의 학풍과 관료로서의 자세가 계승, 발전하였더라면,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정부의 근대화정책이 더욱 실효를 거둘 수 있었을 터이다.


     김육은 오늘날의 정치가나 관료가 귀감으로 삼아도 좋을 인물이다. 그는 도덕적으로 자신을 수양한 다음 백성과 나라에 이로운 정치 이념을 발전시키고 정책으로 구현하여, 확고한 소신을 가지고 줄기차게 추진하였다. 그는 선진 외국으로부터 열심히 배우고 기존의 좋은 정책을 발굴하여 추진하였으며, 새로운 정책의 창안에 급급하지 않았다. 그는 옳다고 생각하면, 이해 당사자의 입장이 반영된 반대 여론에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파당적 이해나 자리의 보존보다는 정책의 구현에 자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빠른 이동 메뉴
  • 주소 : (03060) 서울시 종로구 종로구 율곡로 33 안국빌딩 7층
Copyright © KCDF.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