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담원 정인보(鄭寅普)
1893∼1950 / 한학자이며 교육자, 민족사학자, 국혼(國魂)환기운동 전개
  • 문화관광부는 교육자이자 민족사학자이며 국혼(國魂)환기운동을 전개한 담원 정인보(鄭寅普 : 1893∼1950?) 선생을 7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일제 암흑시대가 끝나자 즉시 대한민국 건국 준비사업에 참여하였고 건국 후 초대 감찰위원장직을 맡아 새 나라의 관기(官紀)를 바로잡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1950년 6·25 남침으로 병상에 누운 선생이 북한군에 끌려가게 되어 이제 다시는 선생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생애 및 업적
  •  선생은 1893년에 태어나서 1950년 6·25 동란 때 서울에서 납북당하여 정확한 사망연월을 알 수 없다. 납북당시의 나이가 58세이므로 살아 계신 다면 올해 108세에 해당한다. 선생은 동래(東萊) 정씨 명문가에서 태어나서 나이 18세(1910년) 되던 해에 나라가 망했다. 그 해 난곡 이건방 (李建芳)선생 문하에 들어가 한학 공부를 하였고 3년 뒤 중국 상해에 유학 하였다. 중국에서는 신규식(申圭植)을 비롯하여 홍명희, 문일평, 조소앙, 신채호 등 인사와 사귀었고 중국인 학자 장병린의 국학사상에 접하여 그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귀국하여 국내에서 한학 공부를 계속 하였다. 1923년 연희전문(연세대학교 전신) 교수로 부임하여 불교전문 이화여전의 교단에도 섰다. 1926년 조선왕조 최후의 황제 순종이 승하하자 그 능 비문 (裕陵誌文)을 쓰게 되었으나 그 내용이 불온하다는 친일파의 밀고로 채택되지 않았다.


     그 뒤 선생은 활발하게 '동아일보' 지상에 국학 관련 논설을 썼는데 그의 주된 목적은 일제 침략으로 비록 나라는 망했으나 우리 조상들이 남긴 거룩한 문화유산을 널리 국민에게 알려야 하겠다는 것과 우리 민족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역사 속에도 위대한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1920년대에 쓴 그의 글은 이 같은 두 가지 목적을 위해 쓴 논설로 볼 수 있다. 첫째 '조선고전해제'를 신문에 연재하였고, 둘째로 우리나라 역사가 낳은 큰 인물로 시조 단군과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 임진왜란 때 거북선으로 왜구를 물리친 충무공 이순신, 그리고 조선왕조의 고질적인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농촌 빈곤 타파를 역설한 실학자 다산 정약용을 들었다. 지금은 이들 인물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나 일제하에서 실의에 빠진 민중들은 못난 우리 조상을 탓하고 원망할 뿐이었다. 3·1운동의 열기는 식어가고 학자들마저 얼이 빠져 우리 민족의 강한 자존심과 높은 사기는 땅에 떨어져 이렇게 하다가는 나라는커녕 민족마저 사라지겠다고 생각되던 때였다.


     1930년 좌우익으로 갈라진 민족진영이 통일에 실패하고 이듬해 일제의 대륙침략 전쟁(만주사변)이 시작되자 민족의 사기는 한층 떨어져서 실낱과도 같았다. 그러한 때 담원 선생은 '5천 년간 조선의 얼'을 발표하였다. "누구나 어릿어릿하는 사람을 보면 얼빠졌다고 한다. 얼빠진 사람은 꺼풀만 남은 사람이다." 담원 선생은 이렇게 말하면서 "사람의 얼은 결코 남이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가 잃어버리는 것이다"고 하였다. 선생은 사람의 죽음 가운데 육체의 죽음(身死)보다 더한 것이 마음의 죽음(心死)이라고 하면서 우리 민족의 마음이 되살아나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담원 선생은 실학을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물질적 발전이나 경제적 발전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 발전과 인격적 수양을 강조했던 것이다. 선생은 실심(實心)을 강조했지 실물(實物)을 강조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진실한 마음, 즉 실심은 실물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인데 사람들은 모두 물질만 생각하였고 또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담원의 국학연구 가운데 가장 소중한 업적은 단군 연구이다. 그는 단군이 없이는 한국이 없고 한국인이 없다고 강조하였다. 담원은 끝까지 지조를 잃지 않고 일제와 타협하지 않은 한국의 마지막 선비였다. 그의 선비정신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그를 한국의 문화인물로 꼽아 충분하다 할 수 있다. 그렇게 어렵게 견디어낸 암흑시대가 끝나자 즉시 대한민국 건국 준비사업에 참여하였고 건국 후 초대 감찰위원장직을 맡아 새 나라의 관기(官紀)를 바로잡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누가 생각이나 하였을까. 1950년 6·25 남침으로 병상에 누운 선생이 북한군에 끌려가게 될 줄이야. 우리는 이제 다시는 선생을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우리의 실심을 잃지 말자"고 한 선생의 말씀을 되새겨봐야 할 때인 듯하다.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 아버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 아버님은 단군이시니 개천절의 노래 (정인보 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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