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만취당 권율 (晩翠堂 權慄)
1537~1599 / 조선 중기의 명장
  • 문화관광부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 이치대첩 등 수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육전의 명장이자 도원수인 충장공 권율(權慄, 1537∼1599) 장군을 6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생애 및 업적
  •  권율(權慄, 1537∼1599),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 이치대첩 등 수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육전의 명장, 도원수 권율 장군은 1537년 강화도 연동에서 영의정을 지낸 권철(權轍)의 아들로 태어났다. 158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사헌부 감찰, 낭관 등을 거쳐 1591년 의주목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로서 방어사 곽영(郭嶸)을 따라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북진하다가 용인에 이르러 왜군에 패배를 당하고 광주로 되돌아갔다. 그 후 장군은 도내 유력 인사와 동맹을 맺고, 이웃 고을에 모병 격문을 돌렸으며, 지방민의 인심을 수습하고 안정시키기 위해 약법(約法)을 발표함으로써 1500여 명의 군사를 모아 전열을 재정비한 후 다시 북진하였다. 그 후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梨峙)에서 전주로 들어오려는 왜군을 맞아 싸워 격퇴시킴으로써 호남을 보존하였다. 그 공으로 그해 나주목사를 거쳐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장군은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북진하여 수원의 독성(禿城)에 들어가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공격해오는 우키다(宇喜多秀家)군을 지구전과 유격전으로 격퇴하였다.


     1593년 명나라 군과 협력하여 서울 수복작전을 펴기 위하여 군사 2천여 명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들어가 진을 쳤다. 그해 2월 왜장 총수 우키다를 비롯하여 왜군 3만 명이 공격하여 오자 일사불란한 통솔아래 관군과 의승병이 분전하여 적에게 막대한 손해를 입혀 격퇴하였다. 이것이 행주대첩이다. 그 뒤 왜군의 재침을 경계하여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옮겨가서 전세를 관망하였다. 그 동안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회담이 진행되어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휴전상태에 들게 되자, 장군은 전라도로 돌아갔다. 그해 6월에 도원수가 되어 영남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1595년에 도망병을 즉결 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 판윤에 재기용되었으며, 호조판서,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명의 제독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의 도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퇴각령으로 철수하였고 순천의 왜군도 공격하려 하였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려하는 명장(明將)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1599년에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서거한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선무공신 1등에 봉해졌다. 행주(幸州)의 기공사(紀功祠)에 제향 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임진왜란을 통해서 보여주는 권율 장군의 애국애민 정신, 유비무환의 정신, 공평무사의 정신, 엄정한 군기 등의 구국정신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제시해 주는 바가 크며, 가슴속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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