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충무 이순신 (忠武 李舜臣)
1545~1598 / 조선시대 명장
  • 문화관광부는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해전의 명장 이순신 장군(李舜臣 1545-1598)을 1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생애 및 업적
  •  이순신 장군은 조선조 인종 원년 1545년 음력 3월 8일(당시 양력 4월 28일) 서울 건천동(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아버지 이정(李貞)과 어머니 초계변씨(草溪卞氏)사이에서 태어났다. 장군은 문반가문 출신이었음에도 어려서부터 무예를 즐겼으며 시재에도 밝았다. 1576년에는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함경도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임명되었고 그 뒤에도 여러 관직을 거쳐 1588년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와 그 다음해 녹도둔전관(鹿島屯田官)을 겸하게 되었다.


     그 곳에서 장군은 북병사 이일(李鎰)의 모함을 받아 첫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1589년 정읍현감이었던 장군은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조방장(助防將)이 되었고 1591년 2월에는 서애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어 거북선을 만드는 등 임진왜란에 대비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왜적이 부산을 침략하자 장군은 5월 4일 첫 출전을 하여 <옥포대첩>을 시작으로 그 뒤 7월 8일 <한산대첩>, 9월 1일 <부산대첩>등 크고 작은 전투에서 연전연승하고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 후 정유재란이 발발하기까지 해전은 거의 소강 상태로 들어 갔으나 왜구가 침략할 것을 대비하여 평소 전쟁준비를 하던 중 조정에서는 이른바 '요시라 첩보사건'에 연류되었다는 이유로 1597년 3월 4일 장군을 투옥시켰다. 그 뒤 장군은 많은 옥고를 치르고 4월 1일 출옥하여 두번째 백의종군의 길에 오르게 된다.


     한편 원균이 거느린 우리수군은 7월 16일 칠천량 싸움에서 거의 전멸상태에 이르러 조정에서는 7월 22일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하였다. 그 뒤 8월 15일 보성(寶城) 열선루(列仙樓)에서 우리수군을 전폐하라는 조정의 밀지를 받고 "아직도 배 12척이 있고 신이 죽지 아니하였으니..."라는 장계를 올리고 또 그 유명한 '한산섬의 노래(閑山島歌)'를 지어 읊으면서 해전지휘관으로서의 책임감과 고독함을 달래곤 하였다. 9월 16일에는 단지 13척의 전선으로 10대 1의 열세 하에서 적선 31척을 크게 쳐부수어 세계 어느 해전에서도 그러한 전과를 찾아볼 수 없는 <명량대첩>을 거뒀고, 이어서 발음도(發音島:전라남도 신안군)에서 진을 치고 머무는 동안에도 해남 울돌목을 비롯, 해전과 육전에서도 크게 승리하였다. 그 후 보화도(寶花島:전라남도 목포)에서 100여일 머물다가 1598년 2월 고금도(古今島)로 다시 진을 옮겼으며 그 해 7월에는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과 합진함으로써 해상전력을 강화하였다. 이때 풍신수길의 유언에 따라 왜적이 철수하게 되자 한척의 배도 놓치지 않겠다는 굳센 각오로 11월 19일 남해 노량에서 적선 200여척을 부수어 <노량대첩>을 마지막으로 장식하였다. 이때 장군은 "지금은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단 말을 내지 마라"란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54세의 일기로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장군은 임진왜란(1592~1598)으로 풍전등화와 같았던 나라의 운명을 구해낸 구국의 명장이었다. 또한 시문에도 탁월했던 장군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난중일기(亂中日記)』를 비롯, 장계(狀啓), 어머님을 찾아뵙기 위해 체찰사 이원익에게 휴가를 청하는 눈물겨운 편지인 '상체찰사 완평 이공 원익서(上體察使 完平 李公 元翼書)', '한산섬의 노래(閑山島歌)' 등 여러 편의 시와 시조를 남겼다. 이순신 장군의 전생애는 그 모두가 충(忠)과 효(孝)로 점철된 우리민족의 위대한 표상으로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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