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 / 동학(東學)의 창시자
  • 문화체육관광부는 동학의 교조인 수운 최제우(崔濟愚) 선생을 1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생애 및 업적
  •  수운 최제우는 1824년 10월18일 경주에서 아버지 최옥(崔 )과 어머니 한씨(韓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그는 유학선비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성리학을 공부하고 성장해 가면서 당시 왕조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과 동아시아 문명의 기성적 가치관이었던 유.불.선의 쇠태를 예감하고 전국의 명산대찰을 찾아 나섰다. 구도의 길에서 그는 독자적 고민과 사색으로 민족과 창생을 도탄에서 건져내는 "광제창생"(廣濟蒼生)의 새 길을 모색했다. 최제우는 1860년 동학을 염두에 둔 후 '제선(濟宣)'이란 이름을 널리 우민을 고난에서 구제한다는 '제우(濟愚)'로 개명하고 새로운 민족종교로서 동학을 포교하였다. 동학은 신분차등의 양반사회를 부정하고 사람은 누구나 자신 속에 한울님을 모신 존귀한 인격이라는 시천주(侍天主)사상을 가지고 만민평등의 큰 뜻을 전파하였으며 평민도 "보국안민"의 주체로 승격할 수 있다는 자유평등의 민족사상을 국민들 마음속에 심어주었다.


     최제우는 서양에서 침투해오는 서학에 대한 대항의식으로 우리민족도 한울님인 천주의 천도(天道)를 깨우쳐서 다시 민족부흥의 정신적 기초를 마련한다는 신념에서 자신의 "천도"를 동학이라 했다. 즉 천주의 학(學)임을 내세우고 밀어닥친 서양외세에 대한 대응과 민족의 "보국안민"을 위해 우리민족이 예로부터 지녔던 한울신앙, 한울님 신앙의 경천(敬天)사상을 회복하여 동학을 천주·천도의 종교임을 천명한 것이다. 당시 조선왕조가 해체기에 들어 가게 된 문명론적 근거로써 당시의 양반 사회가 부패하고 무규범의 혼란에 빠진 근본원인이 "천명을 돌보지 않고 천리에 순응치 않는" 역천에 있다고 믿고 경천사상으로 새 민족사회의 윤리적 기초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경천사상은 이미 천의 은덕이 임금이나 왕조 지배층에만 미친다는 왕권천수설 같은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신분차등 없이 시천주의 인간존엄의 주체가 되어 성(誠)과 경(敬)의 덕을 닦으면 모두가 군자가 될 수 있다는 평민의 인간자존 의식을 깨우쳤다. 한편으로 그의 동학은 왕조사회의 쇠망을 대담하게 예언하고 후천개벽의 새 시대가 도래한다는 지상신선적인 이상향을 제시하고 당시 서양과 일본의 침략에 대한 "척양왜(斥洋倭)"적인 민족자주적 저항의식을 서민들의 마음속에 불어 넣었다. 왕조 해체기에 피지배층인 백성들에게 신흥종교로 탄생한 동학은 그 교세가 날로 커졌다. 이를 본 조정은 이 동학교문을 민중의 반란조직처럼 위험시하고 특히 나라가 이단시하던 서학으로 오인하여 교조 최제우를 체포하였다. 그리하여 최제우는 1864년 대구 장대에서 "사도난정"이란 죄목으로 순교하게 되었다.


     민족자주, 인간존중, 만민평등을 바탕으로 한 그의 민본주의사상은 그가 순교한 후 갖은 탄압과 박해 속에서도 나날이 번창하여 갑오동학혁명에서 3.1 독립운동에 이르는 우리나라 근대민족사의 정신적 주류가 되었다. 그의 동학교리를 한문체로 엮은 『동경대전』은 오늘날까지 천도교의 경전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특히 한글가사로 쓰인 『용담유사』는 우리 국문학사속에서도 사상표현과 역사예언을 담은 도참(圖讖)문학으로 높이 평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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