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고하 송진우 (古下 宋鎭禹)
1889~1945 / 정치가, 독립운동가
  • 문화체육부는 교육가이며 언론인으로서 일제치하에 우리민족의 독립과 계몽활동에 앞장서고 해방 후에는 민주정부 수립에 헌신한 애국지사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를 금년도 1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중앙학교 학감과 교장을 역임하면서 고하는 열혈청년 교육자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심어주기에 노력하였고 우국지사들과 함께 조국 독립운동을 도모 하였다.
생애 및 업적
  •  고하 송진우(1890 ~ 1945)는 조선왕조 고종 27년 양력 6월 24일 전라남도 담양의 학문을 숭상하는 부유한 명가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신평(新平)이고, 호는 고하(古下)이며, 송훈(宋壎)의 넷째 아들로 어머니는 양씨(梁氏)이다. 세 살 때부터 한학을 배웠고 의병대장 기삼연(奇參衍)에게서는 민족주의적 훈도를 받은 그는 신학문을 가르치는 영학숙(英學塾) 에서 평생 동지인 인촌 김성수(金性洙)를 만나 우정의 길을 열었으며 1915년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유학시절 고하는 조선유학생연합친목회 총무를 보면서 유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많은 일을 하였으며 계몽적이면서도 민족적인 잡지 학지광(學之光)을 발간하여 높은 평판을 받았다.


     중앙학교 교장 재직 시 학교를 근거지로 김성수, 현상윤(玄相允), 최린(崔麟), 최남선(崔南善) 등과 함께 3.1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겪었다. 1921년부터는 동아일보에 몸을 담고 사장 또는 고문, 주필 등을 역임하면서 1940년 강제 폐간될 때까지 동아일보를 통하여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제창, 이충무공유적보존운동, 문맹퇴치운동 등을 전개하였고 완바오산(만보산) 사건이 일본의 한중 이간책(韓中 離間策)임을 폭로하여 양국 간 분쟁의 참화를 막았으며 종교의 자유를 들어 일본의 신사 불참배 사건을 옹호하였고 학도병 권유 유세 강요를 칭병으로 거부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한국민주당 수석총무와 동아일보 사장을 지내면서 공산당을 배격하고 민주정부를 수립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신탁통치문제와 관련하여 미 군정청과 임시정부와의 충돌을 피하고 국민운동으로 반탁을 관철해야 한다는 신중론을 피력하였으며 1945년 12월 30일 자택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아 숨졌다.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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