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한성준 (韓成俊)
1874~1942 / 조선 말기의 명고수
  • 문화관광부는 명고수이자 한국무용의 대가인 한성준(韓成俊) 선생을 9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선생이 창안했거나 재구성한 춤들은 우리 춤 중에서 가장 탁월하고 정통성 있는 춤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중 승무(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와 태평무(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는 제자들에 의해 전승되고 있으며,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생애 및 업적
  •  충남 홍성에서 아버지 한천오와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한 한성준 선생은 6, 7세 때에 외조부 백운채에게 춤과 장단을 처음 배웠고, 이후 서학조에게 줄타기와 각종 민속예능을 학습하는 등 일찍이 예인의 길로 들어섰다. 선생은 어릴 적부터 춤과 장단, 줄타기 등 민속예능에 출중한 재능을 보여 동네에서 어릿광대로 불리었고, 홍성을 비롯한 서산, 태안 일대의 각종 민속연회판과 굿판에 참가, 예술적 기량을 보여주었으며 17세 때에 수덕사에서 3년간 독학수련으로 춤과 장단을 연마하기도 하였다. 28세가 되자 전국 유랑 길에 올라 적국 각지의 민속예능을 접하였으며, 31세 때에 서울에 정착, 원각사에 출연하였고 고종으로부터 참봉이라는 벼슬을 직계 받는가 하면 판소리 명창들과 궁중어전의 연회에 참가하는 등 명고수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후 송만갑협률사 일원으로 전국 순회공연을 펼쳤으나 한일합방으로 이 단체가 해산되자 서울로 상경하여 후진들에게 춤과 장단을 가르치며 수많은 기예자를 길러냈고 라디오에 출연하거나 판소리 명창들의 음반취입에 고수로 참여하면서부터 고수와 전통 춤꾼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해나갔다. 1934년에는 국악인들의 모임체인 조선성악연구회 일원으로 참가하여 임원을 역임하였고, 이 경험을 살려 1938년 근대 전통춤 교육의 산실인 조선음악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한영숙, 강선영, 김천홍 등 기라성 같은 전통무용가를 배출하는 등 후진양성에 주력하였다.


     1935년부터 선생은 창작 전통춤을 무대에 올렸을 뿐 아니라 1940년 일본경찰의 감시 속에 일본에서 공연을 하기도 함. 선생은 인생 후반기 대부분을 춤을 재구성 하거나 집대성하는 작업에 몰두했는데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1941년에는 소설가 이태준, 화가 고희동과 함께 제2회 조선예술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궁중에서 전습되던 정재와 민간에서 추던 민속춤을 바탕으로 선생이 새롭게 창작한 전통춤은 승무, 태평무, 살풀이춤 등을 비롯 왕의 춤, 영의정춤, 좌의정춤, 급재춤, 도승지춤, 진사춤 등 40여 가지에 이르는데 그중 승무, 태평무, 살풀이춤 등은 우리 전통춤의 가장 탁월한 춤형식의 전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선생이 창안했거나 재구성한 여러 유형의 전통춤이 오늘날 가장 정통성 있는 춤 계보를 형성·유지되고 그중 승무(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와 태평무(중요무형 문화재 제92호)는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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