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금원 윤봉춘(琴園 尹逢春)
1902~1975 / 영화감독, 배우
  • 문화관광부는 한국영화의 거장이자 독립운동가인 윤봉춘 선생을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927년 당시 영화배우로 활동하던 나운규의 권유로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이 제작한『들쥐』라는 영화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영화계에 투신하여『잘 있거라』,『금붕어』, 『사랑을 찾아서』등에 출연하였고 1930년 대동영화사가 제작한『도적놈』에 영화감독으로 데뷔함으로써 본격적인 영화예술인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생애 및 업적
  •  아버지 윤득주와 어머니 최성의 사이에서 함경북도 정평에서 태어난 윤봉춘은 주로 회령에서 성장했으며, 회령공립보통학교에 다니는 동안 나운규와 친구로 만나 그의 영향으로 영화, 연극 등에 관심을 가지는 한편, 학생신분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선생은 명동중학교 재학시절 북간도와 회령을 오가며 독립신문 배달과 독립선언서 제작 등 독립운동을 하였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회령에서 만세시위에 앞장섰다가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6개월간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출옥 후 서울중동학교 재학시절에도 독립군 활동경력을 이유로 청진형무소에 수감, 1년 6개월의 복역을 하였다.


     복역을 마친 선생은 한국영화의 개척자인 나윤규의 권유로 1927년 조선키네마 프로덕션이 제작한『들쥐』라는 영화에 출연, 영화계에 투신한 것을 계기로『잘 있거라』, 『금붕어』,『사랑을 찾아서』,『사나이』,『옥녀』,『벙어리 삼룡』등에 잇따라 출연, 본격적인 영화배우로 활동하는 한편 1930년에는 대동영화사가 제작한『도적놈』의 영화감독을 맡아 영화연출자로의 영역을 확대하였다. 배우겸 감독으로 성장한 선생은 성실하고 신념에 찬 영화인으로 활동함으로써 영화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데 크게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1942년에는 일제가『조선영화령』에 따라 모든 영화사를 통합,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영화인들을 전쟁 선전영화를 제작하는데 이용하려 하자 이를 거절, 영화계를 일시 떠나 경기도 의 정부 산곡리에『산곡학원』이라는 간이학교를 세워 어린이교육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 후, 1945년 해방이 되자 영화 활동을 재개하여 『윤봉길의사』, 『삼일혁명기』, 『유관순』 등을 감독하고『산촌의 여명』,『자유만세』등에 출연하므로써 해방의 감격을 영화로 묘사하는 한편, 한국영화의 새로운 출발을 주도했으나 6.25 전쟁으로 다시 한번 고난을 겪게 되고, 6.25 전쟁이 끝나자『고향의 노래』를 감독한 것을 시작으로 1956년에『처녀별』,『논개』 1957년에『다정도 병이런가』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의욕적인 영화 활동을 계속하였다.


     해방 이후 주로 감독으로 활동했던 그는 특히 독립투사 등 애국지사의 활동을 소재로 한 영화를 즐겨 만들었으며, 일제에 끝까지 저항하다 감옥에서 숨진 독립투사『유관순』이라는 영화는 같은 제목으로 1947년, 1959년, 1966년에 거쳐 3편의 제작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는 생애에 영화출연 24편, 감독 21편, 출연 및 감독 2편 등 총 47편의 영화 작품을 남겼으며, 영화감독, 배우의 길을 떠난 후에도 영화계의 원로로 활동하며 '영화의 날'(10월 27일) 제정, '한국영화 40년사'를 비롯한 각종 자료 정리 등 한국영화 발전기반구축을 위해 크게 공헌하였다. 선생은 한국영화 발전에 헌신한 공로로 1964년 국가문화예술 포상, 1970년 국가 문화보상 문화예술상을 수상했으며 1993년에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 공로로 나운규와 함께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으며, 1991년 문화부가 정한 '연극, 영화의 해'에 '5월의 영화인'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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