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초정 박제가(楚亭 朴齊家)
1750~1805 / 조선 후기의 실학자
  • 문화체육부는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로서 정치·사회제도의 개혁을 주창하였던 박제가(朴齊家, 1750~1805)를 금년도 8월의 문화 인물로 선정하였다. 조선시대의 서출양반으로서 당시 정치·사회제도의 모순점과 개혁방안을 제시하였고, 또한 신분적인 차별타파와 상공업을 장려하여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국민의 생활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생애 및 업적
  •  선생은 율(栗)의 6대손이고 승지 평(坪)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 며, 자(字)는 차수(次修)이고 호(號)는 초정(楚亭)으로 알려져 있다. 1776년(정조 즉위년)에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이서구(李書九)등 과 함께 건연집(巾衍集) 이라는 사가시집(四家詩集)을 내었고, 1778년에는 사은 사채제공(蔡濟恭)을 따라가서 이조원(李調元)등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고 돌아온 뒤, 청나라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하여 북학의(北學議) 내 외편을 저술하였는데, 내편에서는 생활도구의 개선을, 외편에서는 정치 사회제도의 모순점과 그 개혁방안을 다루었다.


     1779년에는 규장각의 초대 검서관(檢書官)으로 임명받아 13년간 규장각 내 외직으로 근무하였고, 1786년 왕명으로 당시 관리들의 시폐(時弊)를 시정 할 수 있는 구폐책(求弊策)을 올리게 하였는데, 그가 진언한 소는 주로 신분 적인 차별 타파와 상공업을 장려하여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국민의 생활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790년에는 정사(正使) 황인점(黃仁點)을 따라 두 번째 연행(燕行)길에 오르고,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에서 다시 왕명을 받아 연경에 파견되었는데, 원 자(元子:뒤의 순조)의 탄생을 축하한 청나라 황제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하여 정조는 한낱 검서관이었던 그를 정 3품 군기사정(軍器寺正)에 임시로 임명하여 별자(別咨)사절로서 보낸 것이었다. 1798년에는 북학의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응지농정소(應旨農政疏)를 정조 에게 올렸는데 소진본북학의(疏進本北學議)는 이때 작성된 것이며, 1801년(순 조1)에는 사은사 윤행임(尹行恁)을 따라 네 번째 연행길에 올랐으나 돌아오자 마자 동남성문의 흉서 사건에 혐의가 있다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805 년에 풀려났다.



     선생은 시·그림·글씨에도 뛰어난 재질을 보였는데, 청대(淸代) 사고전서 (四庫全書)계열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대련형식(對 聯形式)을 수용해왔고 글씨는 조선말기의 서풍과 추사체의 형성에 선구적 구실을 하였으며, 그림은 간결한 필치와 맑고 옅은 채색에 운치와 문기(文氣)가 짙게 풍기는 사의적(寫意的)인 문인화풍의 산수 인물화와 생동감이 넘치는 고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그의 유작으로는 대련글씨, 시고(詩稿), 목우도(牧牛圖), 의암 관수도(倚巖 觀水圖), 어락도(魚樂圖), 야치도(野稚圖)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북학의, 정유집, 명농초고(明農草藁)등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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