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이세보(李世輔)
1426 ~1478 / 조선후기 시조작가
  • 문화체육부는 조선후기의 문관으로 우리나라 시조문학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시조작가 이세보(李世輔, 1832~1895)를 금년도 7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조선시대 왕족사대부로서 당시 관료사회의 부정부패와 시국의 참상을 작품에 실어 과감히 비판하고 계도하는 등 다양한 주제로 459수나 되는 많은 시조작품을 남겼으며, 월령체(月令體)와 민중가요 형식을 시조에 도입하는 등 기존의 형식과 내용에 새로운 변화를 줌으로써 평시조의 영역을 확대시켰다. 문화체육부는 선생의 생애와 업적 및 문학세계를 재조명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7월을 "이세보의 달"로 정하고 각종 기념행사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생애 및 업적
  •  선생은 아버지 전주이씨(全州李氏) 단화(端和)와 어머니 해평윤씨 (海平尹氏) 사이에서 4남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자(字)는 좌보(左甫) 이고 호(號)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세인 1851년(철종 2) 풍계군(豊溪君) 당의 후사(後嗣)가 되어 이름을 호(晧)로 개명하고 소의대부(昭義大夫) 종2품 경평군(慶平君)의 작호를 받았으며, 21세에는 현록대부(顯綠大夫) 정1품이 되어 철종의 수라상을 감선하는 직책을 맡았다. 1860년(철종 11)에는 외척 세도일가의 전횡을 논한 일로 인하여 전라도 강진 신지도에 유배되었다가 1863년(고종 즉위년) 조대비(趙大妃)와 흥선 대원군의 배려로 석방되었으며, 1865년(고종 2)에 부총관(副摠管)으로 벼슬을 다시 시작하여 1894년까지 여주목사(驪州牧使), 도총관(都摠管), 한성부판윤 (漢城府判尹), 형조판서(形曺判書), 공조판서(工曺判書)와 판의금부사(判義禁 府事) 등을 지냈다.


     선생은 조선시대 시조 작가 중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많은 459수의 시조 작품을 남겼는데, 흔히 다른 사대부들이 관념적(觀念的)이고 음풍농월적 (吟風弄月的)인 시조로 일관했던 것과는 달리 부정부패 비판, 유배, 애정, 도덕, 절후(節候), 기행, 계고(稽古), 유람유흥, 농사 등 작품 주제가 매우 다양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특히 세도정치로 혼미했던 조선후기 철종 시대에 고관대작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당시 관료사회의 부정부패와 참상을 시조에 담아 비판·고발함으로써 사회질서를 바로잡고자 노력했으며, 판소리나 민요 등에서 보이는 현실 비판의 민중가요 형식을 시조에 도입하고 월령체 시조를 처음으로 쓰는 등 기존의 전통적인 평시조의 형식과 내용에 새로운 변화를 주었다. 또한 시조사상 가장 많은 유배시조와 애정시조를 지었으며, 사대부로서 우리 민족의 고유시형인 시조의 마지막을 가장 성대하게 장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시조집으로는「풍아(風雅)」,「시가(詩歌)」등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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