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 / 조선 후기의 학자, 우국지사
  • 문화관광부는 한말의 역사가이자 시인이며 1910년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자결 순국한 우국지사 매천 황현(梅泉 黃玹 : 1855∼1910)선생을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생애 및 업적
  •  매천 황현(梅泉 黃玹 : 1855∼1910), 한말의 역사가이자 시인이며 1910년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자결 순국한 우국지사이다. 선생은 1855년(철종 6년) 전남 광양군 봉강면 서석촌에서 아버지 황시묵 (黃時默)과 어머니 풍천 노씨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선조 가운데에는 황희(黃喜)정승이 있고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황진(黃進)장군과 병자호란 때 의병장을 지낸 황위(黃暐)장군이 있다.


     매천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재주가 있어 선생을 가르친 왕석보(王錫輔)는 일찍부터 매천이 장차 큰 학자가 되리라 예언하였다. 열한 살 때 한 무리의 기러기를 보고 "기러기 소리 처음 어른들 노는 자리에 들려오네"라는 한시를 지어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24세 되던 해(1878년)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와 이건창, 김택영 등과 교유 하면서 매천의 글이 장안에 알려지게 되었고, 26세 되던 해(1880년)에는 금강산을 유람하며 기행시를 썼으며, 그의 뛰어난 글 솜씨로 인해 한말삼재 (韓末三才)의 한사람으로 일컬어졌다. 29세 때(1883년) 부모의 소망을 풀어드리기 위해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 하였으나 시골출신이라 하여 2등으로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단념하고 전남 구례 만수동에 칩거하며 시작(詩作)과 저술에 전념하였다. 34세 때(1888년) 부모의 권유를 어기지 못해 다시 과거에 응시, 합격하였으나 부정부패로 찌들어가는 정치 현실에 실망하여 벼슬길을 영영 단념하고 구례 월곡마을에서 「매천야록」「오하기문」「동비기략」등의 저술에 전념하였다. 45세 때(1899년)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언사소(言事疏)」를 지어 조정에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매천은 언로(言路)를 열 것, 국민의 신뢰를 얻을 것 등 아홉 가지 개혁방안을 제시하며 병든 이 나라를 회생시켜야 한다고 역설 하였다. 51세 때(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국노를 규탄하는 시 「문변삼수(聞變三首)」와 애국지사를 애도하는 시 「오애시(五哀詩)」를 지었으며, 52세 때(1906년) 최익현(崔益鉉)선생이 대마도에서 순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애시(哀詩) 여덟 수를 지었다. 54세 때(1908년) 향토인 구례에 호양학교를 세워 신식학문을 가르쳤다. 이 학교는 그 뒤 일제에 의해 폐교되고 방광(放光) 초등학교가 현재 그 후신으로서 매천선생의 정신을 이어 받고 있다. 56세 때(1910년) 일제에 의해 끝내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지식인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절명시(絶命詩) 4수와 유서를 남긴 채 자결 순국하였다. 장지연은 자신이 주필로 있던 경남일보에 매천의 절명시를 보도했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정간 당하였다. 1911년 매천 사후에 친우 창강 김택영이 상해에서 매천의 시집 「매천집」을 출판 배포하였다. 그 후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매천야록」을 간행하였으며, 1962년 구례 월곡에 「매천사」를 준공하였고, 1985년 전남대학교에서 「매천집」을 간행하여 시 1,015수와 문 361편을 수록하였다. 매천 황현은 직접 독립운동에 나섰던 분도 아니고 벼슬길에 나아가 국정에 관여한 분도 아니었으나 철저히 재야에서 지조를 지키면서 역사를 쓰고 시를 지어 뒷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기는데 전념하였다.


     선생이 남긴 시는 1,015수에 이르렀으며 그가 평생 동안 기록한 「매천야록」 등 역사서는 우리나라 역사정신의 표본이 되어 오늘에 빛나고 있다. 매천사학은 박은식, 송상도, 이병헌, 신채호, 정인보 등으로 이어졌으며 매천문학은 한용운, 윤동주 등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절명시
    난리 속에 살다보니 백발이 성성하구나 그동안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는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게 되었구나 가물거리는 촛불이 푸른 하늘을 비치는 도다. 요망한 기운에 가려 임금 자리 옮겨지더니 구중궁궐 침침하여 해만 길구나 이제부터는 조칙(詔勅)이 다시없을 것이니 옥같이 아름다웠던 조서(詔書)에 천 가닥 눈물이 흐르는구나 새와 짐승이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낯을 찡그린다. 무궁화 이 강산이 속절없이 망하였구나 가을 등잔불 밑에 책을 덮고 수천 년 역사를 회고하니 참으로 지식인이 되어 한평생 굳게 살기 어렵구나 일찍이 나라를 위해 한 일 조금도 없는 내가 다만 살신성인할 뿐이니 이것을 충(忠)이라 할 수 있는가 겨우 송나라의 윤곡(尹穀)처럼 자결할 뿐이다. 송나라의 진동(陳東)처럼 의병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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