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석봉 한호 (石峯 韓濩)
1543~1605 / 조선 중기의 서예가
  • 문화체육부는 조선중기 명필로 우리나라 서예사(書藝史)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석봉 한호(1543~1605)를 금년도 6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한석봉은 왕희지체(王羲之體) 등의 고법(古法)을 바탕으로 부단한 학습과 노력을 통하여 독특한 서풍(書風)의 석봉체(石峯體)를 이루어 냈으며, 국가의 주요문서를 작성하는 사자관(寫字官)의 효시가 되어 직업서가로서의 영역을 구축하는 등 당대의 서예보급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생애 및 업적
  •  개성(開城) 출신으로 알려진 한호는 군수(郡守) 한대기(韓大基)의 5대 손이자 정랑(正郞) 한관(韓寬)의 손자로 본관은 삼화(三和)이고, 자는 경홍(景洪)이며, 호는 석봉(石峯)·청사(淸沙)이다. 1567년(명종22)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사자관(寫字官)으로 국가의 주요문서와 외교문서를 도맡아 작성하였으며, 와서별제(瓦署別提)·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가평군수(加平君守)·흡곡현령(谷縣令) 등을 지냈다. 한호는 여말선초 이래 유행했던 송설체(松雪體)로부터 전아(典雅)한 필법으로 전환되는 조선중기에 왕희지체(王羲之體) 등의 고법(古法)을 토대로 오랜 공력을 쌓아 숙련된 필치의 강경(剛硬)·단정(端正)한 석봉체 (石峯體)를 이룬 서예가(書藝家)이다.


     국가의 서사(書寫)업무를 담당하는 사자관으로 활약하면서 선조(宣祖 : 1552~1608)의 두터운 신임과 후원을 받았고, 특히 1583년 왕명으로 쓴 「해서천자문(楷書千字文)」은 이후 내부(內府)에서 간행·반포되어 석봉체의 보급에 주된 역할을 하였으며, 그의 글씨는 중국에도 널리 알려져 절찬을 받았다. 석봉체는 선조의 어필(御筆)에 영향을 주는 등 왕실을 비롯하여 도회의 대관(大官)에서부터 시골의 학동(學童)에 이르기까지 민간에 널리 전파 되었으며, 석봉체를 따른 대표적인 인물로 왕실에서는 선조 이외에도 원종(元宗), 인목대비(仁穆大妃), 인조(仁祖), 정명공주(貞明公主) 등이 있고, 민간에서는 오준(吳竣), 김집(金集), 조희일(趙希逸) 등을 들 수 있으며, 사자관으로는 이해룡(李海龍), 이경량(李景良), 한민정(韓敏政 : 한호의 아들) 등이 있다.


     한편 한호는 선조 대에 확립된 사자관의 효시가 되어 이후 직업서가의 전형으로서 후대의 사자관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으며, 무엇보다도 고법에 대한 그의 인식과 학습은 후대의 서가들을 계발시켜 조선중기 서풍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밖에 그의 필적으로는 다수의 진적(珍籍)과 함께 각본(刻本), 금석문 (金石文), 편액(扁額) 등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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