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정지용(鄭芝溶)
1902-? / 한국의 시인
생애 및 업적
  • 정지용(鄭芝溶) : 1902-?, , 이상(李箱)의 시를 실어 그를 시단에 등장시켰으며, 《문장(文章)》을 통해 조지훈(趙芝薰)·박두진(朴斗鎭)·박목월(朴木月)의 청록파(靑鹿派)를 등장시킴. 섬세하고 독특한 언어를 구사하여, 한국 현대시의 신경지 개척.


    시에는 《향수(鄕愁)》 《압천(鴨川)》 《이른봄 아침》 《바다》 등이 있고, 시집에는 《정지용 시집》이 있음.


     정지용은 1902년 5월15일(음력)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40번지에서 약종상을 하는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옥천공립보통학교(지금 죽향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 선배인 홍사용, 박종화, 김영랑, 후배인 이태준을 만나 글쓰기의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박팔양 등 8명과 함께 동인을 결성, 동인지 《요람》을 10여호 까지 펴낸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교내문제로 야기된 휘문사태의 주동으로 이선근과 함께 무기정학을 받아 수업을 받지 못했다. 이 해 12월《요람》창간호에 그의 첫 발표작이자 하나뿐인 소설<3인>을 싣는다.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첫 시<풍랑몽>을 썼으며 이듬해 휘문학교의 교비생으로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한다. 재학기간동안 시 <석류> <바다> 등을 썼으며 1926년 《학조》창간호에 <카페 프란스>등 9편의 시를, 그리고 《신민》《문예시대》에 <홍춘> <산엣색시 들녘사내> 등을 발표 시인으로 등단한다.


     1929년 도시샤대학을 졸업하고 고국에 돌아와 모교의 영어교사로 부임한다. 정지용을 기다리던 박용철, 김영랑과 함께 동인지《시문학)》을 창간, 순수시운동의 물길을 튼다. 1933년 《가톨릭청년》창간부터 편집고문을 맡아 신앙시를 발표하고, 이태준, 이무영, 김기림 등과 함께 반 카프적 입장에서 순수문학의 옹호를 취지로 한 『9인회』를 만든다. 정지용은 일본 강점기의 문인탄압과 회유에도 꺾이지 않은 민족시인이었다. 해방공간인 1948년 《문장》에 발표한 <조선시의 반성>에서 그는 「친일(親日)도 배일(排日)도 못한 나는 산수에 눕지 못하고 들에서 호미도 잡지 못하였다. 그래도 버릴 수 없어 시를 이어 온 것인데 이 이상은 소위 '국민문학'에 협력하던지 그렇지 않고서는 조선시를 쓴다는 것만으로는 신변의 위협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고 고백한데서 그의 투철한 민족애를 읽을 수 있다. 그의 첫 시집 《정지용 시집》(1935)에 수록된 <향수>등은 일찍이 우리민족이 체험하지 못한 모국어의 눈부신 개척을 이뤘거니와 조국광복의 불빛이 보이지 않을 때 빼앗긴 조국을 '고향'의 이미지로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로 각인시키고 일깨웠던 것이다.


     정지용은 일제강점기에 높은 문학성과를 거둔 《문장》의 시 추천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뒷날 『청록파』라는 한국시사의 한 유파를 형성한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을 발굴하였으며 이밖에도 이한직, 박남수, 김종한 등 역량 있는 시인들을 시단에 내놓는데 기여했다. 이 가운데 《문장》(1940년 9월호) 의 추천평에서,「박목월 군, 북에는 김소월이 있었거니 남에는 박목월이가 날만하다. 소월의 톡톡 불거지는 삭주 구성조(龜城調)는 지금 읽어도 좋더니 목월이 못지 아니 아기자기 섬세한 맛이 좋다」고 북의 소월과 남의 목월을 비교하기도 했다. 1941년에 펴낸 두 번째 시집《백록담》에서 정지용은, 백록담으로 상징되는 조국의 자연에 대한 깊은 탐험을 내면의 언어로 형상화시키는 높은 경지를 보여준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읜 어린 송아지는 움매―움매 ―울었다. 말을 보고도 등산객을 보고도 매여 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모색(毛色)이 다른 어미에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는 대목에서 시인은 다음 세대가 이민족에게 말과 글을 배우게 되는 불행에 대해 통곡을 터뜨리고 있다.


     1946년 이화여전 교수를 사임하고 경향신문 주간직을 맡아, 이 해 《지용시선》을 펴낸다. 그리고 다음 해 경향신문을 나와 다시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복직했다가 1년 만에 그만두고 녹번리 초당에서 시작에 전념한다. 1948년에 37편의 시, 수필, 기행문이 수록된 《문학독본》을 출판한다. 이태준이 북으로 넘어가자 그는 "소설가 이태준 군 조국의 서울로 돌아오라"는 글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나고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그는 정치보위부에 체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납북된다. 1988년 정지용 문학이 해금되자 지용회가 결성되어 올해까지 옥천지용제 16회, 서울지용제 3회, 연변지용제 6회, 지용문학상 15회가 거행되고 정지용 문학 연구가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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