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관산 조철호 (冠山 趙喆鎬)
1890~1941 / 독립운동가
  • 문화체육관광부는 우리나라 청소년운동의 선구자이자 독립운동가인 한국보이스카우트 창설자 조철호 선생을 7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다 조철호 선생의 이러한 애국정신과 청소년교육사상은 일제식민 치하에서 우리나라 국권회복의 길을 마련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미래의 주인이 될 청소년들에게 건전한 가치관을 확립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생애 및 업적
  •  보이스카우트 전신인 조선소년군을 창설한 소년운동의 선구자로서 일제 식민통치아래서 소년운동과 병식교육을 통하여 애국정신을 배양함으로써 국권회복의 기초를 다진 교육자이자 독립 운동가이다. 아버지 조중인과 어머니 유씨 사이에서 태어난 조철호 선생은 유년시절 집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6세 때인 1906년 구한국 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09년 폐교되어 일본 동경유년학교로 유학, 2학년에 편입하였고, 1910년 한일합방의 소식을 듣고 광복을 기약하며,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13년 제26기생으로 졸업, 그 후 일본 선대에서 근무하다 휴직을 하고 1914년 평북 정주 오산학교의 체조교사로 근무, 이때 설립자 이승훈 선생과 교장 조만식 선생의 뜻을 따르며 학생들에게 애국사상을 길러주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정주의 3.1운동을 적극적으로 지도했으며 군용 기밀품을 가지고 상해로 탈출하려다 국경에서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고, 출옥된 후 중앙고보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이때 학생들에게 민족교육을 강화하는 한편 마침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던 보이스카우트 운동을 연구하게 되면서 일제의 압박을 피해 구국독립운동과 애국사상을 심어줄 수 있는 한 방법으로 1922년 10월 5일 조선소년군(현 한국보이스카우트)을 조직하고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1923년에는 소파 방정환 등과 함께 조선소년운동협회를 조직하고 5월 1 일을 어린이날로 제정, 매년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개최하였고, 1924년 3월 1일에는 조선소년군 총본부의 총사령장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그동안 집필한『소년군교범』을 발간하여 조선소년군을 지도하였고, 1926년 6.10만세 운동을 주도, 이로 인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총독부의 압력을 받아 중앙고보 교사직을 사직한 후 용정에 있는 대성중학교와 동흥중학교에서 교원으로 봉직하였으나, 1927년 다시 항일운동 혐의로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31년 6월에는 조선소년군 총사령장에 다시 취임하고 10월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근무하면서 조선소년군 육성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1937년 7월 31일 파고다공원에서 개최된 시국강연회의 안내를 맡았던 조선소년군이 착용한 항건에 태극마크와 무궁화가 도안되어 있는 것을 트집 잡아 일경은 조철호를 구속하고 일제의 어용단체인 건아단에 통폐합하기를 강요하였으나 이에 굴복하지 않자, 조선소년군 활동을 애국 광복운동으로 간주하여 9월 3일 강제 해산을 당하였다. 1939년 동아일보를 사직하고 보성전문학교의 교관으로 들어갔으나 교단에 돌아온지 1년 여만인 1941년 3월 22일 "나는 일을 다 하지 못하였는데...."라는 말을 남기고 51세를 일기로 숨을 거둠. 그의 유해는 현재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치되어 있다. 1962년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최고 훈장인 무궁화 금장이 추서되었고, 1977년 12월 13일 정부로부터 건국포장 추서, 1988년 중앙중, 고등학교의 중앙교우회로부터 자랑스러운 중앙인으로 선정, 1990년 정부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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