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백헌 이경석(白軒 李景奭)
1595~1671 / 조선 중기의 문신
생애 및 업적
  • 이경석(李景奭) : 1595~1671. 조선 중기 문신. 인조·효종·현종 3대에 걸쳐 병자호란후의 어려운 국정을 주도한 명상(名相). 말년에 궤장까지 하사 받음.


    명·청 교체기 숭명의리(崇明義理)보다 국가 보위를 위한 실리외교를 주장하고 삼전도 비문을 찬술. 경학에 근본한 학문과 문장 글씨가 특출하고 '백헌집(白軒集)'을 남김.


     백헌 이경석(1595~1671)은 병자호란을 겪은 인조와 그 국치를 설욕하려고 북벌론을 구현하려던 효종, 그리고 그를 이은 현종 3대에 걸쳐 활동한 명상(名相)이다. 그의 활동 시기는 밖으로 명청 교체로 말미암은 국제질서의 변화와 안으로 전란을 계기로 한 사회·경제적 급격한 동요 속에서 국가재건과 민생회복, 그리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이룩하여야 하는 역사적 명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들을 선도·추진해야 할 정계는 난전의 동서당론(東西黨論)을 그대로 물려받아 서남(西南) 내지 노소남(老少南), 노소(老少)의 당쟁에 더욱 휩싸이고 있었다. 이경석은 이와 같이 안팎으로 얽힌 난국을 적절하게 주관한 명상으로, 말년에는 관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궤장을 하사받는 명예를 누리기까지 하였다.


     이경석은 지방의 목민관이던 아버지 이유간의 임지를 따라 출생지인 제천을 비롯하여 평양 산음 개성 등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10세 전후부터 18세 연상인 백형 석문 이경직에게서 글을 배웠다. 또한 약관에 이르러서는 현주 조찬한에게서 고문(古文)을 배워 사장(詞章)의 근원에 대하여 막히는 데가 없이 통달하였다. 게다가 이경석은 글 읽기를 좋아하여 늙어서도 책을 손에 놓지 않고 연찬하였다. 특히 소학(小學)을 평생 기율(己律)의 준칙으로 삼으면서 경전 위주 학문에 정진하였다. 경전 중에서는 『호씨춘추(胡氏春秋)』와 『논어(論語)』를 정독하였으며 그밖에 각 시대의 사서(史書)를 탐독하였다. 한편, 한유의 『창여집(昌黎集)』과 두보의 우국시를 좋아하였으나 노장자의 글은 이단이라 하여 보지 않았다. 말년에는 『근사록(近思錄)』과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애독하였다. 그러므로 이경석의 시문은 경학에 근본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게다가 ‘붓을 잡고 글을 지으면 맑고 아름다우며 빛을 내고 화려하다’고 하여 ‘심고천재(甚高天才)’라 칭송되었다. 특히 ‘시(詩)는 원활 조창하여 독특한 일가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게다가 필법(筆法)도 독특한 일기를 이루어 ‘명품’으로 소장하는 이가 많았다.


     이경석은 당대를 대표하던 대문장가이기 때문에 인조와 효종의 행장을 짓고 후일 논란의 대상이 된 ‘삼전도 청태종 공덕비’의 비문을 찬술하게까지 되었다. 이경석은 정묘·병자호란 전후의 어려운 대청외교를 숭명의리(崇明義理)에 바탕을 둔 명분론에만 얽매이지 않고 명청교체(明淸交替)라는 국제질서의 변화에 부응하기 위한 실리론을 주장하면서 난후의 국가보위와 경제회복에 진력하였다. 또한 국정운영에서의 최대 역점을 당색제거에 두고 난후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 자신도 사관한 후 조정에서 정론을 펼 때는 고사하고 공사 간에 남과 교류할 때에 조차도 한 번도 당론과 당색을 거론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경석이 당국할 때는 서남대립과 노소분당에 조짐이 분명해질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 시비의 초점은 서인의 송시열과 남인의 윤휴로 대표되는 서남 간의 주자경전의 주해에 대한 사정론(邪正論)과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야기된 기해예송(己亥禮訟)에 쏠려 있었다. 예학에도 밝은 이경석은 이런 와중에서 어느 편에 쏠리지도 않고 세조 조에 제정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준거한 기년설을 주장하여 정국을 이끌었다. 또한 인사행정면에서도 이경석은 당색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을 뿐 아니라 시종일관 공정한 인사행정에 주력함으로써 난후의 어려운 국정을 이끌어간 동력을 마련하였다.


     이경석은 50년 가까운 사관기간 중 이조의 낭관에서부터 판서에 이르기까지 인사를 담당하는 관직을 비교적 오랫동안 역임하였다. 또한 좌, 우, 영의정 등 3정승을 역임하면서도 특히 인재 등용에 정성을 다하였다. 게다가 숨은 인재를 찾아서 등용시키는데 힘을 기울였다. 숨은 인재에 대해서는 견문한 대로 ‘문학(文學) 행의(行誼) 무재(武才) 이능(吏能)’ 등으로 분류하여 ‘인대’라고 이름한 인재록에 자세히 기록하여 놓고 필요할 때 등용시켰다. 심지어 산림에 은거하여 조정에 나오지 않는 ‘암혈유일지사(巖穴遺逸之士)’까지 빠짐없이 찾아서 기록하였다가 기회 닿는 대로 등용시켰다. 이 인대에 기록된 두드러진 예가, 영달한 뒤 도리어 이경석의 생애와 행적을 비판하고 배척한 송시열을 비롯하여 송준길 권시 이유태 등 저명인이다.


     이경석은 사회 경제 정책면에서도 난후 민생회복을 위한 균부(均賦)와 휼민(恤民)을 국가 재건의 기본정책으로 삼아 추진하였다. 병자호란을 겪은 뒤에는 더욱 민생과 국가재건을 논의할 때마다 군비의 확충과 양병(養兵)보다도 민생회복의 위선을 강조하였고, 그 방책으로 균부와 휼민책을 역설 실행토록 하였다. 그중 두드러진 예가 권설의 구황청을 발전시켜 중앙의 상설기관인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하는 전기를 마련한 것이었고, 김육이 주창하던 대동법(大同法)을 충청도에서 먼저 시행, 이점을 보다 선명하게 부각시키면서 전국 8도에 확대 실행하게 유도하였던 것이다. 현재, 이경석의 역사적 위상은 올바르게 재조명되어야 마땅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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