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호산 조희룡(壺山 趙熙龍)
1789~1866 / 조선 후기의 서화가
생애 및 업적
  • 조희룡(趙熙龍) : 1789~1866, 조선 후기의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

    수예론(手藝論)을 강조함으로써 매화도와 묵란도에서 고유의 화풍을 확립. 1847년 벽오시사(碧梧詩社)를 결성, 후배화가들을 이끌고 문인화단의 중심인물로 활동, 추사 김정희 등이 도입한 중국 남종 문인화로부터 이념미를 배제하고 조선적 감각을 가미한 《조선문인화(朝鮮文人畵)》의 세계를 열었음. 작품으로는 《홍매도대련(紅梅圖對聯)》, 《홍백매 팔연폭(紅白梅 八連幅)》, 《위천하지노인도(爲天下之勞人圖)》 등이 있음.


    1. 과거를 딛고 새롭게 나아가게 하는 힘 ‘조선 문인화(朝鮮文人畵)’의 세계를 연 화가 조희룡은 1789년 5월 경기도 양주(지금의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서 태어났다. 그가 보낸 어린 시절은 정조 치하의 평화로운 세상으로서 ‘조선진경(朝鮮眞景)’ 문화가 꽃을 피웠다가 퇴락하던 시기였다. 그림에서 조선적 소재를 추구하던 ‘조선진경’은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등 불세출의 대가들을 배출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조선진경은 지속되지 못하고 정체기를 맞이하였고 때맞춰 유입되던 청의 발달된 문물로 인해 신선감을 잃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그 폐해로 말미암아 사회기강이 해이되고 색정적 속기가 만연하자 ‘건강한 조선’을 앞세우던 ‘진경’은 1830년대에 이르면 문화현상으로서의 주도적 위치를 급속히 상실하고 만다. 사회는 사치에 빠지고 타락과 방종이 극에 달해 있었다. 조선사회가 나아갈 새로운 길을 찾던 젊은이들은 당시 일부 선각자에 의해 도입되던 중국의 남종 문인화(南宗 文人畵)에 주목하였다. 거기에 새로운 길이 있었다. 조선진경의 현장주의는 문인화의 관념세계로 대체될 수 있었고 그것의 색정적 속기는 탈속한 정취를 강조하는 문인화의 고답적 이상주의로 해소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젊은이들은 문인화의 고답성이 조선 백성들의 영혼을 맑게 씻어 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탈속한 정취에의 열렬한 추종이 문인화 운동의 추진력이 되었다. 조희룡은 30세 전후에 이러한 문인화를 학습하게 되었다. 그는 문인화를 공부하면서 자신의 길을 개척한다는 창조적 자세를 견지하였다. ‘남의 수레 뒤를 따르지 않겠다(不肯車後)’라는 그의 자세는 그로 하여금 과거를 끊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


    2. 불긍거후(不肯車後)로 연 새로운 세계 [매화도와 묵란도] 조희룡은 처음 배웠던 중국의 대가 동이수와 나빙의 매화법에 매달리지 않고 전혀 새로운 매화의 세계를 열었다. 대작 매화도 ‘장륙매화(丈六梅花)’를 창안하고 소략하였던 꽃그림에서 수만 송이가 만발한 매화도로 발전시켰다. 이어 선비의 고결함을 상징하던 매화를 대자대비한 부처의 마음으로 탈바꿈 시켰고 더 나아가 매화 줄기의 전체적 구도를 비상하는 용으로 대체함으로써 그림 전체에 격렬한 역동성을 부여하였다. 매화도에 있어 조희룡 만큼 확실한 위치를 구축한 화가를 찾아볼 수 없었다. ‘시’를 보편으로 규정하고 ‘난’을 외부로 표출된 미의 실체로 규정하면서 자신의 이러한 이론이 구현되어 있는 난을 ‘경시위란(經詩緯蘭)’이라 했다. 난에는 나라 잃은 중국 한족들의 ‘극단적 상실의 정서’ 대신 시를 통해 얻어진 ‘깊고 그윽한 즐거움’이 기탁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본질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기초 화란법조차 무시되는 거침없는 필치가 종종 구사되었고, ‘뿌리 뽑힌 채 고통에 시달려 바짝 마른 난잎’ 대신 ‘ 잘 자라 살지고 알맞게 통통한 잎새’가 그려졌다.


     [조선 문인화(朝鮮 文人畵)] 조희룡을 내세움은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하나의 세계를 제기하는 것이다. 조희룡을 주장함은 우리 미술계가 잃어버리고 있었던 ‘조선 문인화’라는 세계를 찾아주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조선을 전면에 내세우며 우리 강산과 토종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그린 시대를 ‘조선진경’이라 하였듯이 조선인의 감각을 중시하는 문인화를 우리는 ‘조선 문인화’라 할 수 있다. 조희룡은 중국 남종 문인화에서 그림을 배웠으나 화법과 이념에서 중국인들의 그것을 절대시 하지않았다. 조희룡은 남의 뒤를 따르지 않겠다는 ‘불긍거후’라는 낱말을 통해 조선 문인화의 단초를 열었다. 조희룡은 중국의 예술이론에 있어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가슴에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들어있어야 한다’라는 이론이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중국인들은 ‘문인들이라면 서권기(書卷氣) 문자향(文字香)이 가슴속에 들어 있어야 한다’ 라고 했고 ‘산수화를 그리려면 먼저 가슴속에 언덕과 절벽(邱壑)이 들어있어야 한다’ 라고 했다. 그러나 조희룡은 비록 가슴속에 ‘서권기 문자향’이나 ‘구학(邱壑)’이 이루어져 있다 하더라도 손의 기량이 따라주지 않으면 그것을 표현할 수 없다고 하였다. ‘산이 높고 달이 작다’ 라는 개념을 그림으로 그릴 때 가슴속의 그것과는 별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손의 기량에 그림의 성패가 달려 있음을 강조한 말이다. 조희룡은 가슴속에 이루어져 있는 ‘심의’보다 화가로서의 ‘기량’을 중시하는 화론을 새로이 정립하였다. 이를 조희룡의 수예론(手藝論)이라 한다.


     조희룡의 친구들과 그를 따르는 후배들이 조선 문인화의 세계를 열었다. 그들은 벽오시사(碧梧詩社)라는 모임을 만들고 거기에서 이론을 토론하고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희룡은 ‘전기’, ‘유재소’, ‘유숙’ 등 시대의 맨 앞줄에 서있던 후배화가들에게 자신의 ‘수예론’을 지도하면서 중국의 문인화 이론을 우리의 시각으로 소화하였다. 전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화랑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의 화실 ‘이초당’에서 그림감정과 중개활동을 통해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였다. 그는 벽오시사의 맹원들에게 조선 사람이 사랑하고 시장이 즐겨 찾는 문인화를 요구하였다. 유숙은 도화서의 그림과 진경산수와 중국 문인화를 섭렵하면서 각자의 장점을 두루 수렴하였다. 벽오시사의 맹원들은 조선인의 미감각에 호소하는 그림을 그렸다. 벽오시사를 중심으로 한 화가들에 의해 조선인의 감각미가 강조된 ‘조선 문인화’가 첫발을 뗀 것이다. [중국 남종 문인화] 조희룡과 그 주변의 화가들이 문인화의 조선화를 추구한데 반해 추사 김정희와 그의 제자 허유는 중국 정통 남종 문인화의 이념에 충실했다. 김정희는 청년시절 중국의 신문물에 접한 이후 중국의 문예를 조선에 도입하였다. 김정희는 ‘서권기 문자향’이라는 중국 문인화의 이념미를 고집한데 반해 조희룡은 그림에서 중국식 이념을 탈색시키고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강조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3. 시련을 딛고 이룩한 절정 조희룡은 1851년 조정의 예송논쟁에 개입하였다가 전라남도 신안군 임자도에 유배조치 되었다. 그는 유배지 오두막집에 ‘만구음관’이라는 편액을 붙이고 그 속에서 칩거하면서 집필과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다. 당호가 있는 그의 그림 19점 중 8점이 이 때 나올 정도로 활발한 작품 활동이 있었고 묵죽법(墨竹法)과 괴석도(怪石圖) 그림에 일가를 이룸은 물론 중국 송나라의 대가 ‘곽희’가 만든 산수화 개념조차 수정하여 ‘조선 산수화’ 특유의 감각미를 강조하였다. 유배 시기 조희룡의 기량은 이론의 정립과 기량의 완숙으로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1853년 조희룡은 3년간의 임자도 유배생활을 마감하고 서울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그는 후배지도와 은거생활을 계속하다가 1866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러나 조희룡과 김정희가 심어놓은 문인화의 씨앗은 계속 싹을 틔워 나갔다. 조희룡의 후배 화가 ‘유숙’으로부터 그림을 배웠던 ‘장승업’이 자신의 스승처럼 벽오사(碧梧社)의 여러 세상을 수렴하여 찬란한 절정의 아름다움을 완성해 냈다.


     조희룡 매화도의 맥이 ‘유숙’을 거쳐 ‘장승업’의 그림세계로 흘러 들어갔다. ‘장승업’의 시대에 오면 그의 앞 시대 선배들이 그토록 고민했던 ‘서권기 문자향’이란 이념미는 눈 녹듯 사라져버리고 대신 벽오시사의 ‘수예이념’만이 그림 속에 가득 차 있다. 중국 남종 문인화 특유의 ‘이념미’는 해체되고 조선인의 색감에 호소하는 감각적 아름다움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중국의 정통 문인화는 ‘호남 남화’로 맥이 이어졌다. 김정희의 제자 ‘허유’는 고향 진도에 운림산방을 짓고 자신의 그림세계를 열었다. 그의 후손들과 제자들은 일제 강점기를 거쳐 오면서 남종 문인화 특유의 이념미에 새로운 시대미를 더해갔다. 나라를 몽고족에게 빼앗겼던 원 4대가의 이념미가 김정희에 의해 도입되었고 그 상실의 정서가 후손과 제자들에게 대물림되었다. 나라 잃은 일제 강점기 조선의 유민들은 이들의 그림에 정서적 공감대를 느끼며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 받을 수 있었다. 2004년 새해에 왜 조희룡을 제기하는가? 그것은 과거를 딛고 앞으로 나가는 조희룡의 ‘불긍거후’ 정신을 제기함이요, ‘남의 수레 뒤를 따르지 않으리라’라는 의지로 연 새로운 세계의 아름다움을 보이기 위함이다.
빠른 이동 메뉴
  • 주소 : (03060) 서울시 종로구 종로구 율곡로 33 안국빌딩 7층
Copyright © KCDF.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