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구당 유길준(矩堂 兪吉濬)
1856∼1914 / 정치가 ·개화운동가
생애 및 업적
  • 유길준(兪吉濬) : 1856∼1914, 조선말기 개화 운동가이자 한국 최초의 국비유학생. 흥사단(興士團)에 참여하여 활동했고 계산학교(桂山學校), 노동야학회(勞動夜學會) 등을 설립하여 국민계몽에 주력하는 한편, 국민경제회(國民經濟會) 등을 조직해 민족 산업의 발전에도 공헌하였음.

    저서로는 최초의 국한문혼용 기행문인 《서유견문(西遊見聞)》, 《노동야학독본(勞動夜學讀本)》, 《대한문전(大韓文典)》 등이 있음.


     구당 유길준(1856-1914)은 조선조 말에 선비 가문에서 '신동'으로 태어나 1876년 개항 이후 열강의 세력 침투 속에서 급변하는 그리고 일제의 강점에 의해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아야 했던 국가적 위기 속에서 살다 간 개화기의 선구자적인 인물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당대 저명한 유학자들로부터 전통한학을 수학하여 과거에 합격할 정도로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그 뒤 박규수와의 만남을 계기로 신문화와 접촉하게 되었다. 1881년 5월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그곳에서 최초의 일본 유학생으로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이 학교의 설립자이며 일본에서 문화 개화론자로 이름을 떨치고 있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집에 기거하면서 그와의 친분이 시작되었다. 이곳에서 새로운 서양의 학문과 사상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신문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돌아와서 박영효의 부탁으로 우리나라에서 신문을 창간할 수 있는 기초를 다져놓았다. 1883년 7월 견미보빙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어 보스턴시 근처의 당대 명문 사립고등하교 더머아카데미(Governor Dummer Academy)에 입학하여 서구의 민주주의, 국제법 등 서양의 사상과 문물을 직접 접하고 배울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당시 피바디 박물관의 관장으로 있던 생물학자 에드워드 모스(Edward S. Morse)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2년 정도 미국에서 체류한 후 귀국 길에 유럽 여러 곳을 돌아보고 왔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갑신정변에 연루된 죄로 체포되어 그 후 7년간 연금되어 지내게 되었다. 그 동안 그는 방대한 {서유견문}을 탈고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본격적으로 서양의 사상, 문물 등을 소개한 개화기의 대표적인 것이다. 연금에서 해제된 이후 군국기무처 회의원, 내각총서, 내무대신을 역임하면서 갑오개혁을 중심에서 이끌어갔다. 이때 많을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그가 일찍부터 주장하던 과거제도 폐지시켰다. 그는 단발령의 실시를 밀어붙여 국민들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친로정권이 수립되면서 정국이 급변하여 전 내각대신들에 대한 포살령이 내려지자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그 후 1907년 8월 귀국할 때까지 12년 가까이 망명생활을 하였다. 그 시절 그는 한때 국내 개혁을 위해 일본 사관학교 출신 청년장교들과 쿠데타를 모의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고 4년 간 유배에 처해져 오가사와라 제도, 하치조섬에서 지내야만 하였다. 이 불우하고도 긴 망명시절에 그는 국어문법을 연구하였으며 국민들을 계몽시키기 위해 외국의 독립사, 멸망사 등 역사에 관한 책들을 번역하였다. 그리하여 귀국 후 {프러시아 프레드릭 대왕 7년 전사}(普魯士國厚禮斗益大王의 七年戰史)(1908), {영법로토제국 크리미아전사}(英法露土諸國의 哥利米亞戰史)(1908) 등을 간행할 수 있었다.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황제가 물러난 직후 유길준은 망명자 신세에서 벗어나 귀국하면서 국가와 국민들을 위해 직접 민중들 속에서 활동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제수된 특진관 자리를 사양하고 재야에서 국민들의 자질을 향상시키고 애국심을 고양시키기 위해 국민교육을 실시하고자 하였으며 지방자치제를 실현시켜 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흥사단을 설립하여 수십 권의 교과서를 편찬하고, 교사를 양성하는 등 전국적인 국민교육의 체계를 세워보고자 하였다. 또 한성부민회를 설립하여 각 방마다 소학교를 설립하고 그 방회에서 운영하도록 하여 국민교육의 지방자치화를 추진하였다.


     이렇게 그가 주장하고 실천한 목적은 우리나라의 '광복'에 있었으며 궁극적으로는 국민들의 자질을 향상시켜서 그가 우리나라에 가장 이상적인 정체라고 주장한 입헌군주제를 실현시켜 우리나라를 문명국 대열에 올려놓는 데 있었다. 또한 유길준은 일찍이 국어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국어를 사용하여 교육하고 계몽하여 국민의 자질을 향상시키고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가 추진한 소학교육도 국어사용을 원칙으로 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도 국한문혼용체로 창간하고자 하였다. {서유견문}도 국한문혼용체로 저술하였다. 또한 그는 우리나라의 국어문법을 연구한 최초의 학자로서 30여 년간을 연구하여 국어문법책인 {대한문전}을 저술하였다. 이와 같이 유길준은 우리나라 개화기 선구자로서 이론을 갖춘 뛰어난 개화 사상가이자 실천력을 갖춘 개혁정치가였으며, 민중과 함께 하고자한 개화 운동가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국어를 보급하고 연구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학자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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