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이인성(李仁星)
1912∼1950 / 서양화가
생애 및 업적
  • 이인성(李仁星) : 1912∼1950, 서양화가. 일본 제전(帝展)에 출품, 수차 입선하였으며 1935년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였음. 작품경향은 서양의 인상주의나 후기 인상주의의 화풍을 나름대로 발전시켜 향토적인 서정주의의 한 전형을 이루었음.


    작품으로는 《경주(慶州)의 산곡에서》, 《실내》 등이 있음.


     화가 이인성(李仁星, 1912-1950)은 1912년 8월 18일 대구시 태평로3가 57번지에서 이해원(李海元)과 이금옥(李今玉)의 4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1950년 초겨울 서울에서 세상을 떴다. 그는 그림에 귀신같은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다. 불과 38년이라는 짧은 생애였지만 이 땅에 험난했던 시대에 그리 길지 않은 세월동안 머문 화가라고 하기에는 이인성이 우리 미술계에 남긴 족적은 너무나도 선명하기만 하다. 화가로서 등단은 마치 혜성이 다가오는 것같이 순식간의 일이었고, 나타나기가 무섭게 그는 단번에 화단의 정점에 올라 한 시대의 미술계를 현란하게 풍미했다. 그래서 늘 그의 이름엔 늘 '귀재', '기린아', '천재화가', '선전 최대의 감격' 같은 화려한 수식어들이 따라다녔다. 그의 천재성은 마치 운명의 산물인 양 출생에서 성장, 그리고 죽음-6.25의 와중에서 사소한 시비 끝에 대한민국 경찰이 쏜 총탄에 의해 죽음에 이르는-까지 화가로서의 이인성의 생애를 둘러싼 일화는 마치 신화나 한편의 드라마 주인공같이 아우라를 발한다.


     바로 이전 시대인 19세기 화단을 천재화가 오원 장승업(1843-1897)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듯이, 이인성을 비켜 20세기 전반의 한국미술을 이야기 하기는 어렵다. 갑작스럽게 신통한 듯이 화명을 날리게 되었다는 점도, 술을 좋아하고 그림 이외의 아무것에도 매이기를 싫어하는 방만한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 있어서도 이인성이나 장승업은 비슷한 점이 많다. 어린 시절 가난으로 정규적인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되 이렇다 할 유수의 걸작들을 소장하고 있던 이응헌의 집에 기식하며 어깨너머로 그림을 배워 불세출의 작가가 된 장승업과 다를 바 없이, 이인성 역시 음식점을 운영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만 마치고 식민지 근대화의 열풍 속에서 서동진이 운영하던 디자인 인쇄 사무실인 <대구미술사>에서 일하며 서양에서 시작된 수채화의 세계에 입문하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며 성공한 화가가 되었다. 그는 불과 18세의 나이에 자신에게 그림을 가르쳐 준 스승 서동진과 동반하여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이라 함)에 최연소의 나이로 입선하고, 곧이어 19세가 되던 해엔 그를 이끌어준 스승과 주변의 여러 선배들을 능가하는 기량으로 유유히 특선을 했으며, 그리고 곧 이어진 일본 유학으로 <광동회>, <제국미술원전>(이하 '제전'이라 함) 등 도쿄화단 활동으로 이른 나이에 이름을 안팎으로 날렸다. 그가 선전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한 것도 불과 이인성이 24세가 되던 해의 일이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 가을 <국전>을 창설할 때 주역으로 활동하던 일도 그의 나이 불과 38세 때의 일이다. 그런 점에서 화가 이인성은 20세기 전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로서, 그 기량 면에서 유사이래 우리나라 미술사상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화가들 예컨대, 솔거, 안견, 겸재, 단원, 혜원, 오원 등 거장들과 함께 천재화가들의 반열에 올릴 만하다. 그러한 그림의 천재성으로 이인성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손기정이 마라톤으로 세계만방에 잃어버린 조선의 존재를 과시했듯이, 안창남이 모험심을 발휘하여 하늘을 비행하며 찢겨진 민족의 자긍심을 드높였듯이, 최승희가 신무용으로 세계무대를 누비며 그랬듯이 민족의 깊은 절망을 어루만졌다.


     이인성의 초기 대구시절 대표작 가운데 하나는 <세모가경(歲暮街景)>이란 수채화 그림이다. 이 작품은 1929년에 스승과 함께 입선한 이태 후 1931년 20살에 선전에서 특선에 올라 또 한 번 크게 세상을 놀라게 했던 그림인데, 이로 인해 그는 그해 가을 일본인 교장 시라카 주키치 후원으로 도쿄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낮에는 오사마 상회 크레용회사에서 사환으로 일하면서 밤에는 그림을 그리며 고된 유학생활 끝에 그 이듬해에는 크레용회사 사장이 그에게 아틀리에를 마련해 주었고, 태평양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받는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받게 되었다. 그에게 1935년까지 4년 동안 지속된 도쿄 체류기간은 세계적인 미술 정보에 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 시기 인상파를 비롯해 후기인상파, 야수파 등 서구 근대기에 이루어진 각종 양식들은 그의 손에 의해 낱낱이 실험되었으며 작가로서 이인성의 기량은 날개 돋친 듯 뻗어나갔다. <온일>(1932년 작), <여름 어느 날>(1932년 작), <초여름의 빛>(1933년 작), <곡진유원지의 일우>(1933년 작), <세토섬의 여름>(1933년 작), <창가>(1934년 작), <실내>(1935년 작) 같은 작품들이 그 좋은 예들이다. 그 결과 이인성은 매년 <선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제전>, <전일본수채화전>, <광풍회전> 등에도 출품하여 입상함으로써 《동아일보》, 《아사히신문》,《요미우리신문》 등 언론들이 조선의 천재소년 화가 이인성에 대한 기사를 연달아 실었으며 유명세를 더해갔다. 그런데 이인성의 개성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은 아무래도 그 이후 향토적 소재에 몰입하면서 발표한 것들일 것이다. <아리랑 고개>, <가을 어느 날>, <경주 산곡에서> 등이 그 예이다. 특히 그의 작품 가운데 <가을 어느 날>과 <경주의 산곡에서>는 그 당시 화단을 압도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각각 동경 유학 말기인 나이 23세 되던 해인 1934년과 24세 되던 1935년에 제작되었으며 앞엣것은 <선전>에 출품하여 특선을 뒤의 것은 창덕궁상을 수상한 작품인데, 이 두 작품은 그로 하여금 단지 촉망받는 신예가 아니라 당당히 대가적인 역량과 스케일로 우리 화단의 최고의 정점에 서 있음을 입증시켜 준 작품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이 작품들이 그 때까지 서구와 일본의 근대미술을 받아들여 우리 화단을 일으켜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과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수준 높은 미학적 독자성을 구현해 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른바 '향토색'을 구현하고 있는 이 작품들은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화면이 아닌 원초적인 생명성을 추구하고 있으며, 인상적 풍경이 아닌 민족의 삶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구상화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인성이 20대 초반에 단지 서구를 향한 열망이나 이국적인 취미의 수용이라 입장에서 벗어나 서양화를 우리의 삶의 현실을 표현해내는 기재로 토착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관심은 귀국 후에 한층 심화 되어 <과수원의 일우>, <한정>, <춤>, <뒷마당>, <해당화> 등으로 계속 심화됨으로써 그만의 독특한 예술양식을 낳았고, 이후 숱한 추종자를 만들어냈다. 1935년 유학생활을 마감하고 금의환향한 이인성은 결혼을 하며 안정된 기반을 바탕으로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면서 더불어 미술운동을 전개했다.


     미술학교가 없었던 당시 아틀리에에 대구 최초의 양화연구소를 개설하여 후진을 양성하는가 하면 <선전> 서양화부 추천작가로서 활약했고, 문화사랑방을 자처한 아르스라는 다방을 열기도 했다. 그 당시 세간에서 이인성이 누리고 있던 인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한 때는 이 다방에 걸려있던 그의 작품 <한정>을 김부돌이라는 자가 칼로 찢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 사건은 이인성의 팬인 김부돌이 이미 추천작가에 올라 상을 받을 자격이 없는 이인성이 <선전>에서 수상소식을 전해 주지 않자 활약이 부진한 것으로 오인하고 작업을 독려코자 저지른 일이 라고 밝혀진 이 사건은 그에 대한 세간의 기대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1938년에는 《동아일보》강당에서 유화 45점, 수채화 20점을 가지고 개인전을 열어 그의 무르익은 화혼을 과시했다. 1940년에는 심형구, 김인승과 함께 개최한 선전 추천작가 3인전은 보통학교만 졸업하고 정규학교가 아닌 태평양미술학교 출신인 이인성이 당시 일본의 국립학교였던 동경미대를 졸업한 나머지 두 사람과 나란히 전시를 개최함으로써 세간의 관심을 크게 불러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이인성의 삶이 평화롭고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갓 태어난 아들 영미, 둘째 딸 귀향이 일찍이 사망했고, 급기야 부인 김옥순도 병사했다. 방황과 혼돈의 세계로 빠져 술이 과해지고 주벽이 심해지기도 했던 그는 재혼을 하였지만 곧 파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부인을 맞았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서울 아현동으로 이사한 그는 해방과 더불어 만들어진 조선미술건설본부 회원으로 참여하는 등 좌우이데올로기 분열 속에 휘말리며 폭음에 젖어들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는 이화여자중에 미술교사로 부임하여 미술부를 창설하고 이화여자대학교의 서양화부에 강사로 출강하며, 국화회 회화연구소를 세워 연구생들을 열정적으로 지도하며 <이인성 양화전>을 개최하기도 하고 <국전> 창설 주역으로 활동하며 독립된 나라에서 새로운 미술의 설계를 꿈꾸어 갔다. 그러나 그는 어이없게도 사소한 시비 끝에 수복된 서울 자택에서 1950년 11월 4일 39세를 일기로 아쉽게도 세상을 떴다. 어이없게도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경찰관과 벌인 사소한 언쟁이 화근이 되어 경찰관이 발사한 총탄 때문이었다.


     그렇듯이 이인성의 삶과 예술에는 지난 세기 우리 역사의 그림자들과 함께 꿈꾸던 미래가 교차하고 있다. 그는 화단에는 숱한 양식적 추종자들을 남기고 그리고 가족으로는 세 딸과 아들, 부인을 남기고 떠났다. 그에 대한 연구논문이나 연구서도 지금까지 적지 않게 출간되었다. 그를 기리는 <이인성미술문화재단>이 설립되는가 하면, <이인성미술상>이 제정되는 등 '귀재' 이인성에 대한 기억은 이제 반세기라는 시간적인 거리를 뛰어넘어 새롭게 우리의 역사 속에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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