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월명(月明)
생몰년 미상, 신라 경덕왕 때의 승려·향가작가
생애 및 업적
  • 760년(경덕왕 19) 4월 해가 둘이 나타나서 이 괴변을 없애기 위해 향가인 《도솔가(兜率歌)》를 지어서 읊자 괴변이 사라졌다 하며 죽은 누이를 위해 《제망매가(祭亡妹歌)》를 지어 부름으로써 그 영혼을 달랬다고 전함. 《제망매가(祭亡妹歌)》,《도솔가(兜率歌)》등 향가 작품이 삼국유사에 전함.


     삼국유사 권 5 감통(感通) 제 7 '월명사 도솔가(月明師兜率歌)' 조를 보면, 「월명」에 관해 단 3쪽의 기록이 남아 전한다. 문헌의 기록은 네 단락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첫째 단락은 신라 35대 경덕왕 19년 하늘의 해가 둘이 나타난 괴변을 월명사가 <도솔가>를 지음으로써 물리쳤다는 주술적 내용과 <도솔가> 작품 및 해시(解詩)이고, 둘째 단락은 왕이 차와 염주를 내리자 부처님의 시자(侍者)가 받아 미륵상 앞에 놓음으로써 월명의 신통력을 보여주는 설화이며, 셋째 단락은 일찍 죽은 누이를 위하여 <제망매가>를 지은 경위와 작품 및 월명의 신통함에 대한 언급이며, 넷째 단락은 월명이 머무르던 사천왕사와 대금에 얽힌 이야기 및 향가의 성격, 일연의 찬(讚)이다.


     승려로서의 월명은 사천왕사에 머문 밀교의 주술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천왕사는 문무왕 때부터 외적(당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기도를 올린 호국불교의 대표적인 도량이다. 이와 같은 주술적인 힘으로 하늘에 두 개의 해가 나타난 재앙을 물리치는 <도솔가>를 짓게 된 것이다. 또한 월명은 승려이면서 동시에 풍월도에 소속된 화랑이었다. 화랑은 미륵의 화신(化身)으로 인식되어 국가적 인물로 추앙되었는데, 월명은 승려로서 화랑의 조직에 소속되어 화랑도의 종교적, 도덕적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월명은 문학인으로 <도솔가>와 <제망매가> 두 편의 향가작품을 남겼다. 신라의 궁성인 월성(月城) 동쪽 조원전에서 도솔천이 있는 선덕여왕릉(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이 도리천이니, 불교적으로 그 위에 야마천과 도솔천이 있다)을 바라보고 도솔천의 미륵불에게 꽃 뿌리며 노래를 불러 이일병현(二日幷現)의 재앙을 물리쳤다. 또한 어린 누이가 죽자 <제망매가(누이노래)>를 짓고 재를 올려 누이를 아미타세계로 인도하였는데 그 향가는 누이의 죽음에 대한 인간적인 슬픔을 노래한 뛰어난 서정시이다. 국문학자들은 월명을 '우주의 시인'으로, '무속과 불교가 융합한 신화적 상상력의 세계에서 우주적 감수성과 능력을 지닌 신화적 인물'로, <제망매가>는 내용과 수사에 있어 신라가요를 대표할 수 있는 작품이며 '서정시다운 서정시가 충담사와 더불어 월명에게서 처음으로 비롯되었다'는 등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월명은 음악인으로 달 밝은 밤 사천왕사 앞길에서 대금을 불면 하늘을 지나던 달조차 멈추어 들었다고 한다. 대금의 기원인 만파식적(萬波息笛)은 문무왕이 죽어 동해를 지키는 호국용이 되고, 또한 죽어서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 장군, 두 영웅들의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하나가 되어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에게 나라를 지키는 보물로 하늘이 내려준 것이다. 월명은 만파식적을 불며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의 모든 고통과 슬픔(萬波: 모든 파도)을 젓대소리(음악)로 잠재워주었던 신통력을 가진 승려이다. 경주에서는 매년 월명재(금년 제 11회)를 올리며 문학과 음악, 춤이 어우러진 예술축제로 스님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구체적 행사로는 향가를 현대어로 바꾸어 새롭게 작곡한 음악에 성악가들이 노래하는 신 신라향가 발표회, '만파식적제' 등의 대금연주회, 화가들이 그림을 그린 갖가지 등불을 들고 달 밝은 밤 왕릉과 첨성대를 돌며 소원을 비는 연등행사, 월명과 관련된 유적들을 돌아보는 문화답사 등이 있다. 문화답사는 월명이 살았던 시대를 중심으로 전개된 신라의 역사와 문화공간에 대한 체험이다. 신라의 궁성인 월성의 성곽을 돌면서 주변의 유적들을 바라보고, 건너 낭산의 선덕여왕릉과 호국사찰인 사천왕사의 흔적과 문무왕의 비문 받침돌로 추정되는 거북등(龜趺,귀부), 문무왕의 다비(화장)터인 능지탑, 동해변에 이르러 문무왕릉인 대왕암(산골처,散骨處: 뼈를 뿌린 곳) 등을 찾아보고, 아들 신문왕이 호국용이 된 문무왕을 만났다는 이견대에 올랐다가, 돌아오는 길에 감은사지(感恩寺址)에 들러 하늘을 향해 쏟은 쌍탑을 보며 조용히 만파식적이 울리는 가운데 문무왕의 호국정신을 되새겨볼 수 있다. 그밖에 시간이 있어 선덕여왕릉에서부터 경덕왕릉에 이르는 당대 왕들의 능을 둘러본다면 더 풍성한 서라벌 천년의 역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월명은 불교의 밀교(신인종) 승려로 <도솔가>를 지어 하늘의 재앙을 물리쳤으며, <제망매가>로 누이의 왕생(往生)을 도왔고, 대금(만파식적)의 소리로써 외적의 침입이나 자연의 재해를 극복하고 인간의 마음을 다스렸으며,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풍월도(화랑도) 정신으로 한국인의 마음에 전하여져, 지금도 신라의 서울인 서라벌(경주)에서는 매년 10월 월명재를 올리며 그를 추모하고 있다. 올해 10월의 문화인물인 월명에 대한 조명은 곧 통일신라의 초석을 이룬 태종무열왕과 김유신장군(흥무대왕), 문무왕(대왕암), 호국사찰인 사천왕사, 호국용이 된 문무왕을 만난 이견대, 왕을 위해 세운 감은사로 이어지며, 월명을 통해 당대의 정치와 종교와 문화와 예술이 모두 망라되어 오늘의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월명은 통일신라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한 초월적인 종교인으로, 현실적인 화랑도로, 예술적인 시인(향가작가)이요 대금의 달인인 음악인으로 살아왔다. 1200여 년이 지난 지금 그에 대한 기록은 지극히 빈한하지만, 그가 남긴 향가 두 편은 우리 국문학적 값어치로는 그 값을 헤아릴 수 없으며, 대금(만파식적) 연주자의 조종(祖宗)으로서의 위치와 국가를 사랑하는 화랑으로서, 호국승려로서의 행적을 보면, 그가 21 세기 한국인의 정신적 지주로 숭상되어야 할 인물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빠른 이동 메뉴
  • 주소 : (03060) 서울시 종로구 종로구 율곡로 33 안국빌딩 7층
Copyright © KCDF.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