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사명당 유 정(四溟堂 惟 政)
1544∼1610 / 조선 중기의 승려
생애 및 업적
  • 유 정(惟 政) : 1544∼1610, 호는 사명당(四溟堂). 조선중기의 고승. 금강산 등 명산에서 도를 닦았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 휴정(休靜)의 휘하로 들어갔으며 도원수 권율(權慄)과 의령(宜寧)에서 왜군을 격파, 전공을 세우고 당상관(堂上官)의 위계를 받았으며 선조가 죽은 뒤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다가 그 곳에서 사망함. 초서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됨.

     저서로는 《사명당대사집》, 《분충서난록》 등이 있음.


     유정이 살았던 16세기의 조선은 정치적으로나 불교사적으로 매우 불행하고 암울한 시기였다. 우선 정치면에서 보면 이 무렵은 성종 대에 이르러 비로소 되찾은 정치 문화적 안정이 깨지면서 그동안 축적되어 온 갈등과 모순이 한꺼번에 표출되고 있었다. 그 구체적인 현상으로 들 수 있는 것이 4대사화이며, 이 같은 정치적 격동이 모두 유정의 시대와 멀지 않은 시점에서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휴정·유정까지도 무고하게 연루되는 선조 22년(1589) 정여립의 기축역옥은 정치상황의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정치세력이 붕당화하면서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빚는 가운데 조선은 임진왜란의 비극을 맞는다. 한편 유정이 몸담아 있던 불교계는 이 무렵 그 존립자체를 염려해야할 정도의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태종대에서부터 본격화한 배불정책으로 태종∼성종 대에 불교의 경제·사회적·인적 기반 대부분이 와해되었고, 더구나 연산군의 불교박해와 중종의 폐불적 조치들로 조선불교는 거의 빈사지경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명종 대에 잠시 문정왕후에 의한 흥불 시책으로 불교는 그나마 쇠진한 기력을 추스릴 수 있었다.


     휴정·유정과 같은 걸출한 고승들이 역사 위에 출현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짧은 흥불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정은 중종 39년(1544) 밀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유학을 익혔다. 그러나 이에 만족치 않고 16세 때 직지사에 출가하여 18세 때는 승과에 합격한다. 출가 이후 그는 당대의 문사들과 널리 교류하였으며 교단 내에서 선종 수사찰인 봉은사 주지에 천거될 만큼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32세 때 모든 명리를 떨쳐버리고 묘향산의 휴정문하로 들어가 수행에만 전념하여 43세 때는 마침내 무상의 법을 깨닫는다. 49세 때 임진왜란을 당해서는 그는 의승군을 이끌며 구국애민의 선봉에 힘쓴다. 이렇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기 10여년, 유정은 64세에 비로소 다시 산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광해군 2년(1610) 67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유정은 출가 이후 선을 중심으로 수행하였지만 교학 또한 충분하게 연찬하였고, 여기에다 문장과 유학적 지식까지도 두루 갖추었다. 이런 유정의 선·교관, 나아가 선교융섭 및 유불회통적 사상 경향은 그의 행동 및 저술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유정의 사상 형성에는 그의 은사 신묵과 법사 휴정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유정의 선관은 스승 휴정만큼 선·교 분별에 철저한 것은 아니었다. 유정의 선관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임제선법의 요체를 꿰뚫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선사인 유정의 교관 또한 체계적이지는 않다. 다만 그가 법화나 화엄의 교리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유정의 선교관 및 사상에서 주목되는 것은 그 회통적 경향이다. 즉 그는 선교 불구분의 입장에서 선과 교를 융섭하고 있다. 이런 경향은 선과 교에서만이 아니라 유불의 회통에까지 이른다. 선교융섭은 물론 유교와 불교를 함께 회통하려 했던 이 같은 유정의 사상 경향을 이해할 때 비로소 임란 중에 보여준 그의 언행과 활동 또한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다.


     49세 때 금강산에서 임란을 맞은 유정은 스승 휴정의 분부에 따라 의승군도대장이 되어 구국활동의 일선에 나선다. 그리하여 의승군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에 참가하여 크게 전공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전투에 수없이 참가하고 있다. 왜군이 남쪽으로 퇴각하여 사실상 전국이 휴전상태에 있을 때도 그는 의승군과 함께 농사를 지어 군량미를 비축하는가 하면 군기(軍器)를 만들고 산성의 수축에도 진력하였다. 또 휴전 중에 가등청정의 서생포 적진을 드나들며 4차례 걸쳐 담판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 같은 유정의 외교활동은 종전 후 도일 강화외교로 이어진다. 화친을 요구하는 일본에 파견할 적임자로서 선정된 유정은 조정의 명에 따라 선조 37년(1604) 8월 일단 대마도로 건너갔다가, 12월에는 조정의 명과는 달리 일본 본토에까지 들어가 당시의 실권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회담하고 있다. 그의 본토행은 일본국정을 살피고, 신의에 입각한 평화 교섭의 가능성을 타진하며 포로가 된 백성을 쇄환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회담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는 포로 3000여명을 데리고 왔다고도 전하는데, 유정의 이 같은 도일 외교활동이 낳은 가장 큰 결실은 역시 임란의 원한을 풀고 두 나라의 국교를 정상화하여 선린우호관계 확립의 터전을 마련하였다는 점이다.


     유정은 호국대성(護國大聖)으로까지 불리지만, 유정의 위상이 이로써 충분하게 설명되지는 않는다. 그는 한국불교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서산 법맥의 적통(嫡統)으로서도 확고한 위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유정에게 있어 진과 속은 구분 없는 한마당 삶의 무대였다. 그는 전장에서는 용맹한 의승장이었으며, 세속의 현실에 처해서는 경세가였고 탁월한 외교가였다. 동시에 세속을 떠난 선문에서는 법맥의 적통자였던 것이다. 경세가로서 유정의 면모는 특히 그가 남한산성에 주둔하면서 올린 '을미 상소사(乙未上疏事)'에서 확연하게 돋보인다. 이 상소는 요컨대 자주 국방책, 인재등용, 지방관원의 바른 정사론, 백성에 대한 배려와 보호 등을 논리정연하게 제시하고 있어, 경세가다운 면모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유정은 그의 호 사명으로 일반에게 더 친숙하며, 그의 행적에 대해서도 대중은 역사적 사실보다는 이른바 '사명대사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이들 사명대사 이야기는 대체로 임란 중의 활동이 주류를 이룬다. 서릿발 같은 선사의 결단과 담대성, 결연한 정의감, 그리고 깊은 우국충정을 기술하여 유정의 영웅적 풍모를 전하고 있으며, 아예 그를 도력 높은 신승으로까지 묘사한 것들도 적지 않다. 물론 이들 이야기 대부분은 역사적 사실이기 보다는 당시 시대현실과 민중의 의식이 반영된 설화적인 기술들이다. 그러나 유정 당시는 물론 오늘에 있어서까지 민중은 설화 속의 사명대사의 행적에서 통쾌함을 느끼고 그 모습에 공감한다. 그만큼 유정은 영원한 민중의 영웅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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