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 / 고려 말기의 문신·학자
생애 및 업적
  • 정몽주(鄭夢周) : 1337-1392,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고 《신율(新律)》을 간행, 법질서의 확립을 위해 노력했음.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중종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1개 서원에 제향 되었음. 문집에 《포은집(圃隱集)》, 시조에 《단심가(丹心歌)》 등 많은 한시가 전해짐.


     정몽주의 생애를 크게 네 단계로 나눈다면 23세 때까지 학문을 연마하고 과거시험공부를 하던 초년기(初年期), 24세부터 35세까지의 청장년시절 성균관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강학활동기(講學活動期), 36세부터 51세까지 중년시절 왕명을 받들어 중국과 일본으로 왕래하였던 외교활동기(外交活動期), 52세부터 56세로 생애를 마치기 전까지 마지막 5년간은 고려왕조의 명맥을 붙들고 지키기 위해 헌신하였던 사직수호기(社稷守護期)라 할 수 있다.


     주자학은 고려후기 안향(安珦)에 의해 원나라로부터 수입되고 파종되었다면, 고려 말 정몽주에 의해 그 생명의 싹이 터져 나오고 뿌리가 내리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안향이 가져온 학문과 이념의 희미한 불씨를 살려내어 불길이 섶에 옮아 붙게 하였던 것이 바로 정몽주의 시대적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정몽주는 주자학의 기본영역으로서 실천형식을 제시한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시행과 형이상학적 이론체계를 제시한 성리학(性理學)의 학문적 틀을 제시하는데 주력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주자학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당시에 주도적 영향력을 지닌 불교를 비판하는 척불론(斥佛論)을 적극적으로 제기하였던 것이다. 먼저 정몽주는 {주자가례}의 실천운동으로 고려 말에 주자학의 이념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리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곧 {주자가례}를 기준으로 의례제도를 개혁하는 것은 주자학이 지식의 수준을 넘어서 이 시대 유교이념의 실천형식을 정립하는 중대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다. 조선시대의 주자학-도학이념이 사회저변까지 침투하여 견고한 풍속으로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주자가례}를 기준으로 하는 의례제도의 정립에서 가능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성균관 대사성 이색(牧隱 李穡)을 중심으로 젊은 학자들이 성균관에 모여들어 주자학의 학풍을 일으킬 때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때 이색은 정몽주가 경전강의에서 성리학 이론의 명석한 해석에 감탄하여, "정몽주는 이치를 논함에 횡(橫)으로나 종(縱)으로나 이치에 합당하지 않음이 없으니, 우리나라 이학(理學)의 시조로 추대할 만 하다"고 하였다. 곧 그는 '우리나라 이학의 시조'로 추대 받을 만큼 성리학적 인식에서 획기적인 수준에 이르렀던 것이다. 또한 정몽주는 주자학의 엄격한 도통의식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정통에 어긋나는 이단으로 불교를 비판함으로써, 조선 초 전반적 불교비판의 선구가 되었던 것이다. 곧 정몽주는 불교비판의 심화과정에서 교리의 근본문제에 대한 비판으로 한 걸음 들어섰던 것이다. 정몽주는 문신이었지만 무장으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여, 네 번을 출전하여 공을 세웠다. 그는 조정에서도 성균관 대사성에 올라 학풍을 이끌어갈 뿐만 아니라, 54세 때(1390) 부수상의 지위인 문하부(門下府) 수시중(守侍中)에까지 올라 국가 행정의 중심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극심한 혼란에 빠진 고려 말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도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에 혜택을 미치게 하는 행정의 개혁과 법제의 시행을 통해 국가의 기틀을 안정시키기 위해 헌신하였다. 한마디로 그는 밖으로 외환(外患)에 대해서는 장수로 나가서 외적을 물리치고 안으로 내우(內憂)에 대해서는 재상으로서 정치적 개혁과 민생의 안정을 이루었던 이른바 출장입상(出將入相)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고려 말 국가의 위기상황에서 중국과 일본에 사신으로 나가 왕명을 당당하게 전달하고 국가의 안정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중요한 공적을 이루었다. 먼저 명나라가 일어나는 초기에 고려가 가장 먼저 명나라를 따르는 친명(親明)정책을 주도하였다. 이어서 김의(金義)가 호위하던 명나라 사신을 죽이고 북원(北元)으로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정몽주는 그동안의 변고(變故)를 조속하게 알림으로써 중국이 가진 의혹을 풀어주도록 요구하여, 전란의 위기를 해소하였다. 또한 그는 북원에서 사신이 왔을 때에 거절하도록 요구하여 집권자에 저항하다가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왜구의 침략을 억제하기 위해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중국과 일본 사이에 외교문제를 해결하는 주도적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고려사회의 안정을 확보하는데 중대한 공을 세웠던 것이 사실이다.


     정몽주는 고려왕조를 수호하기 위해 혁명을 도모하는 이성계 일파에 맞서다가 제거 당하였으니, 고려의 사직을 지키다가 순절한 '사직지신'(社稷之臣)이다. 그러나 고려 말의 격동 속에서 정몽주는 이성계 일파와 매우 깊은 유대를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이성계가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세우는 과정에서 이성계를 적극 지지하여, 공신호칭을 받기도 하였다. 정몽주가 이성계 일파와 갈라서게 된 결정적 이유는 이성계 일파가 고려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혁명을 도모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고려사회의 체제를 지키며 개혁을 도모하려는 정몽주의 체제수호론과 고려사회의 체제를 폐기하고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려는 이성계의 역성혁명론이 갈라지게 된 것이다. 정몽주가 이성계 일파와 대립하게 되는 입장과 논리의 차이는 현실인식과 규범인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려 말의 격변과정에서 역성(易姓)혁명을 도모하던 이성계의 세력과 고려왕조를 수호하려 한 정몽주 사이에서 야기되었던 갈등에서, 먼저 현실인식이 고려사회의 체제 안에서 개혁을 실현할 수 있다는 정몽주의 입장과 고려사회의 체제로는 근본적 모순과 제약으로 개혁의 실현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성계 일파의 입장은 양립할 수 없는 상반된 것이었다. 또한 이렇게 대립된 가치의식과 시대인식은 '혁명론'과 '강상론'이라는 이념적 대립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강상론'의 입장을 대표하는 정몽주는 혁명세력이 이미 대세를 장악하였던 마지막 순간까지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과 의리를 끝내 고수하다가 마침내 혁명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정몽주는 14세기 후반의 고려 말에 주자학의 다양한 과제들에 대한 인식을 심화함으로써 당시의 시대이념을 정립하고, 조선사회로 나아가는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정몽주는 고려시대에서 역할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려 말에서 시작하여 조선사회로 계승되는 시대정신을 개척한 선구자로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정몽주의 학문과 이념은 그 시대를 이끌어 가며 다음 시대를 관철하여 계승되고 영향을 미쳐갔다.


     그의 주자학-성리학의 학문세계는 고려 말의 당시 사회에서 새로운 시대사조로 깊이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를 이끌어가는 시대이념으로 자리 잡아 갔던 것이다. 특히 주자학이 조선 초기에 사림파(士林派)의 이념으로 정립되면서, 조선 초기 사림파는 정몽주의 학맥을 이어가는 학통으로 확인되고 있다. 사림파를 중심으로 계승되었던 도학정신은 철저히 성리학의 이론을 기초로 하고 수양론과 예학의 실천적 기반을 토대로 하여, '강상'(綱常)의 규범질서와 '화이'(華夷)의 의리론적 명분질서를 정립하였으며, 이 점에서 정몽주의 정신은 고려 말기 사회에서 씨앗이 뿌려졌던 것이요 오히려 조선사회에서 찬란하게 꽃이 피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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