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 / 조선중기의 정치가, 예학사상가.
생애 및 업적
  • 김장생(金長生) : 1548∼1631, 호는 사계(沙溪). 조선중기의 정치가, 예학사상가. 선조 말과 광해군대에 주로 지방관을 역임하였으며 1613년(광해군 5)에는 서얼들이 일으킨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처벌의 위기를 맞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났고 그 후 관직을 포기, 연산으로 낙향하여 예학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였음. 인조반정 이후 여러 관직을 제수했으나 번번이 사양하였음.


    저서로는《가례집람(家禮輯覽)》,《상례비요(喪禮備要)》,《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경서변의(經書辨疑)》 등이 있음.


     사계 김장생(1548∼1631)은 율곡 이이 선생의 적통(嫡統)을 이어받아 조선 예학을 정비한 한국 예학의 종장(宗匠)이며, 임진왜란과 호란 이후 조선의 국가정신과 사회발전의 방향을 정립한 주인공이다. 적통이란 자기 선생과 학파의 사상과 학문의 본 뜻을 가장 잘 이해하고 전수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이고, 종장이란 그 학문의 가장 대표적인 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김장생의 삶과 사상은 17세기 이후 한국 도학자(道學者)들의 예론(禮論)과 의리(義理) 실천의 전형을 이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장생은 아버지 황강 김계휘와 어머니 평산 신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유학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었다. 그 후 13세 때는 구봉(龜峯) 송익필에게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을 배웠으며, 20세 때부터는 율곡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김장생은 율곡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그의 나이 31세(1578년; 선조 11)에 관직에 나갔으나 관직에 뜻을 두기보다는 학문과 저술활동 및 후진을 기르는 일에 전념했다.


     김장생이 35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 김계휘가 세상을 떠나자, 김장생은 상례와 제례를 한결같이 {가례(家禮)}대로 했는데, 다음해 김장생은 {상례비요(喪禮備要)}를 완성했다. {상례비요}는 원래 신의경(申義慶)이 지은 예서(禮書)를 김장생이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원문을 위주로 하여, 일반인이 쓰기에 편리하도록 보충·삭제·교정하여 펴낸 상례의 초보적 지침서였다. {상례비요}가 간행되자 사람들은 대단히 기뻐하고 크게 이용하여 먼 지방이나 시골집에서도 이를 따라 상례를 치르게 되었다고 한다. 김장생은 임진왜란이란 큰 전란을 겪는 와중에서도 학문 연마를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고, 그 결과 51세(1598년; 선조 31)에는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를, 이듬해에는 {가례집람(家禮輯覽)}을 완성했다. {근사록석의}는 주자가 저술한 성리학 책인 {근사록}의 내용을 설명한 것이며, {가례집람}은 관혼상제의 예를 고찰한 것이었다.


     김장생이 이처럼 예론(禮論)에 큰 관심을 기울였던 이유는, '모든 인간이 어질고 바른 마음으로 서로를 도와가며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개개인의 행동방식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질서가 필요하다.' 고 보았고, 그것을 예(禮)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장생의 사상에 있어 어짐(仁)과 바름(義)은 도덕과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며, 예는 올바른 마음과 어진 마음을 드러내는 태도와 절차이다. 때문에 예는 어질고 바른 것이어야 하지만, 어질고 의로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예라는 방법을 통하여 표현되어야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복잡한 사회에서 서로를 존중하면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밝힌 것이 예(禮)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김장생은 예를 행하는 형식은 절대불변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 양상이 변화함에 따라 바뀌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김장생을 "고금의 예설(禮說)을 취하여 뜻을 찾아내고 참작하여 분명하게 해석했으므로 변례(變禮)를 당한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질문하였다." 고 했다. 김장생은 예가 다스려지면 국가가 다스려지고 예가 문란해지면 국가가 혼란해진다고 하여, 예(禮)를 국가 치란(治亂)의 관건으로 보았다. 즉 김장생의 정치사상은 나라를 다스리는 일(治國)이란 인간사회의 조화를 성취한다는 목표가 가장 우선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가르쳐 예절 바르게 살아가도록 한다는 예교(禮敎)와, 다른 사람을 다스린다는 정치(政治)를 일원화(一元化)시킨 것이다.


     {전례문답}은 김장생의 이러한 예치(禮治)에 대한 사상이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된 대표적인 예이다. 인조가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定遠君)의 아들로서 왕위에 오르자, 인조의 친아버지인 정원군을 제사할 때 사용할 축문에서의 칭호와 인조의 어머니인 계운궁(啓運宮)의 장례 복제(服制) 문제, 정원군 추숭의 문제 등이 정치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김장생은 이러한 문제를 종법(宗法)과 국통(國統)을 바로 세워야 국가의 기강이 선다는 정치사상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김장생의 예학과 정치사상은 임진왜란과 호란을 겪은 조선사회의 사회질서와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실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에게 김장생의 사상을 그대로 적용시키려한다면 이는 시대착오적 발상일 것이다. 그러나 김장생은 예(禮)의 본질에는 변치 않는 덕목이 있는 반면, 예의 형식은 시간과 장소 그리고 대상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또한 예(禮)의 가치는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善)을 행하는 데 있으며, 인간의 우열을 가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역할을 다하여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예학(禮學)의 근본정신은 현재 우리 사회의 당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17세기 예학(禮學)과 김장생의 사상은 한국의 지성사적 차원에서 전통예제의 근간을 이룩했다는 학문적 평가를 뛰어넘어, 오늘날의 우리에게 예학의 근본정신에 입각한 창조성을 발휘하라는 훌륭한 가르침을 전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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