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문화인물

보한재 신숙주(保閑齋 申叔舟)
1417∼1475 / 조선 전기의 학자 ·문신
생애 및 업적
  • 신숙주(保閑齋 申叔舟) : 1417∼1475, 뛰어난 학식과 문재(文才)를 지닌 조선전기 학자, 문신. 훈민정음 창제에 공을 세웠음.


    주요저서 : <보한재집(保閑齋集)>


     신숙주는 본관이 고령(高靈)으로, 아버지는 공조좌참판(工曹左參判)을 지낸 장(檣)이며 어머니는 지성주사(知成州事) 정유(鄭有)의 따님이다.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 이하 신숙주를 보한재 선생 또는 공이라 함), 시호(諡號)는 문충공(文忠公)이다. 1417년(태종 17) 6월 13일(丁酉)에 태어난 보한재 선생은 태어나 자라면서부터 여느 어린이들과 달랐고, 자라서 공부를 시작하자 모든 경서와 역사책을 한번 읽으면 기억할 정도였으며 글재주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세종대왕은 유학자들이 훈고(訓誥)만 존중하고 폭넓게 공부하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438년(세종 20)에 처음으로 시(詩)와 부(賦)로 시험을 치르는 진사시험을 실시하였다. 보한재 선생은 서울에서 단번에 으뜸을 차지했으며 같은 해에 생원시험에도 합격을 했다. 또한 이듬해인 1439년에는 문과(文科)에 합격했으며 전시(殿試)에서는 을과(모두 일곱 명)로 급제하였다.


     보한재 선생은 조선 시대 500년 동안에 가장 뛰어난 어학자 중 한 명이었다. 선생은 천부적인 재능으로 세종대왕이 기획했던 언어정책을 충실히 보필하였으며 세종대왕이 1443년(세종 25)에 창제한 훈민정음의 해설서 집필에 참여하여 다른 일곱 학자와 함께 1446년(세종 28) 9월에 {훈민정음해례본} 편찬을 완료하였다. 1445년(세종 27)에는 권 제, 정인지, 안 지 등이 지어 올린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내용을 다른 학자들과 함께 1447년(세종 29)까지에 걸쳐 보완하였다. 이외에도 우리나라의 전승한 자음을 정리하여 표준 한자음을 설정하려는 목적에서 편찬한 『동국정운』이 1447년(세종29)에 6권으로 완료되고 1448년(세종30) 출판되었는데 이때 선생의 나이는 32세였으며 서문까지 쓴 것으로 보면, 이 편찬 사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또한 보한재집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문충공행장을 통해 선생이 여러 나라그 중에서도 특히, 한어(중국어), 왜어(일본어)에 능통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생은 이러한 능력을 통해 한글 창제 후 세종이 계획하고 있던 표준용 우리나라 한자음과 표준학습용 중국 본토 한자음을, 모두 새 표음문자인 한글로 표기하도록 하는 사업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세종대왕은 우선 표준학습용 '중국 본토 한자음'(이를 흔히 漢音이라고 함)을 학습하기 위해서 명나라 태조에 의해 편찬된 {홍무정운(洪武正韻, 홍무 8, 1375)} 에 수록되어 있는 한자의 음을 한글로 주음(注音)하도록 하였는데 이때에도 선생은 세종대왕의 명을 받들어 중국의 요동(遼東)에 유배당해 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을 찾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선생이 황찬의 말을 듣고 빨리 깨달아 막힘없이 대화하였다고 하니, 선생의 한어(중국어) 수준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1443년(세종 25, 계해) 2월 21일에 부사직(副司直)이었던 공이, 통신사(정사 卞孝文, 부사 尹仁甫, 왜학 역관)와 함께 서장관이 되어 10월 19일까지 9개월간 일본에 다녀와서, 당시의 견문록(見聞錄)과 일본의 인명, 지명 등을 한자음으로 기록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후에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가 1471년(성종 2)에 완성되었다. 특히 이 책의 [조빙응접기] 항에서는 일본 사신의 응대법에 대하여 상세히 규정하여 국가행사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는데, 이 또한 일본어에 대한 소양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생은 1458년(세조 4)에 재상(우의정)이 된 뒤에도 10여 년 동안 예조판서를 겸하여 국가 외교에 있어서도 큰 공적을 세웠다. 또한 국방에도 주력하여 1460년(세조 6, 경진) 에 동북 방면으로 자주 침입하는 중국 동북부 지방의 여진족의 토벌책을 제시하고, 동년 7월 27일에 강원, 함길도 도체찰사 겸 선위사(宣慰使)로 임명 되어 북방 오진(五鎭)에 이르러 강을 건너 가 여진족을 공격하여 대첩을 거두고 개선하였다. 이에 대하여 1461년(세조 7, 신사)에 왕명으로 {북정록(北征錄)}을 저술하였다. 이와 같이 선생은 조선시대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의 여섯 왕, 30여 년 동안 학자, 어학자, 정치가, 외교가, 시인으로서 크게 활약하고 1475년(성종 6, 을미) 6월 21일(무오)에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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